리뷰

고스트그룹 〈희년연구〉
소진된 몸에 관한 한 탐색
최찬열_춤비평가

〈구약성경〉의 율법 중에는 토지에 관한 특별한 제도가 있다. 이른바 안식년과 희년의 제도이다. 사람이 6일 동안 일하고 7일 째에는 쉬듯이, 땅도 6년간은 경작하여 소산물을 생산하지만 7년 째에는 경작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는데, 이를 안식년이라고 한다. 그리고 일곱 번째 안식년, 곧 49번째 해의 다음 해는 ‘희년’(jubilee)이라고 하여 모든 거주민에게 자유가 선포되었다. 즉 희년은 50년마다 오는 ‘참된 안식년’으로서, 이때에는 빚을 져서 노예가 된 사람들조차 모든 빚을 탕감받고 자유인이 될 수 있었다. 이를테면 희년은 노동이 없는 해방의 해인 셈이다.

고스트그룹의 〈희년연구〉(2022년 6월 3~4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는 희년의 의미를 일상의 삶과 노동에 지친 몸의 죽음에서 찾고자 한다. 몸이 온전한 안식을 취할 수 있는 때는 바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일 것이고, 그렇다면 죽음은 바로 몸의 희년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기에 고스트그룹이 보기에 죽음은 마냥 슬픈 일만은 아니다. 기실 우리네 삶에서 몸은 일종의 기계이다. 자본과 권력이 조장하는 행위 규칙을 따라야만 하는 철저하게 수동적인 몸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번 공연에서 춤추는 몸들은 능동적인 몸이 되고자 한다. 이를테면 〈희년연구〉에서 안무와 연출을 맡은 김혜윤이 보기에 죽음은 차이 없이 반복되는 삶의 억압과 굴레에서 벗어난 이런 몸이 자유와 해방을 맞이하는 절대적인 계기이다.




고스트그룹 〈희년연구〉 ⓒ고스트그룹




무대는 삼면이 막혀 있고 상수 뒤쪽에 난 통로로만 등퇴장이 가능하게 되어있다. 상수 쪽과 뒷면 일부에는 패널 벽체가 설치되어 있고, 하수 쪽은 전부 두껍고 긴 직사각형 천으로 가려져 있다. 무대 뒤 천정에는 4개의 패널이 영정처럼 걸려 있고, 무대 바닥에는 이런저런 소품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그리고 무대 앞 중앙에는 요리를 할 수 있는 조리대가 설치되어 있고, 그 위에는 김밥 재료와 투명 아크릴 상자가 놓여 있다. 일상생활 공간처럼 보이지만, 그것과는 다른 이상야릇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공간이다. 이른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느껴진다. 마치 유령처럼, 무대 하수 쪽 뒷부분에 세워진 반투명 병풍에 어른거리는 사람의 실루엣과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살랑살랑 일렁이는 누런 천이 이런 느낌을 더 강화한다.

피아노 선율이 잔잔하게 흘러나오면, 무대 상수 뒤쪽에서 3명의 춤꾼이 일렬로 나온다. 그들은 두 손을 아랫배에 가지런히 모은 채 조심스럽고 얌전하게 걸어서 조리대 앞에 선다. 그들이 입고 있는 복장으로 보아, 장례지도사와 그를 돕는 보조 인력으로 짐작된다. 극장 전체에 울려 퍼지는 상조회 직원의 방송 멘트를 따라 그들은 염습 및 입관식 과정을 순서대로 진행한다. 하지만 그들은 장례 절차를 알리는 멘트와 달리 김밥을 말아 투명 아크릴 상자에 넣는다. 곧 그들은 장례 의식에서 가장 중요하고 정성스럽게 진행되어야 할 염습과 입관식 과정을 김밥 마는 과정으로 치환해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다소 과장된 동작과 표정으로 즐겁게 그 일을 하면서 객석을 바라보고 웃음을 짓기도 하는 등 코믹하고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이는 춤 만든 이들의 죽음에 관한 관점을 엿보이게 한다. 우리네 삶에서 일상다반사인 죽음을 족히 마음에 들어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고스트그룹 〈희년연구〉 ⓒ고스트그룹




관을 상징하는 김밥이 든 상자를 들고 세 춤꾼이 일렬로 병풍 쪽으로 걸어간다. 그들이 병풍 뒤를 돌아 차례로 나오면, 병풍 뒤에 서 있던 춤꾼이 상자를 넘겨받아 들고 그들 뒤를 따른다. 그는 젊은 시절의 고인이거나 고인의 아들일 것이다. 상자를 무대 중앙에 놓은 그는, 객석 쪽으로 등을 보인 채 서서 상자 혹은 관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한 후, 상의를 벗어 상자를 덮는다. 맨살을 드러낸 채 구부정하게 숙인 상체의 등 근육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죽음 앞에서 건강한 육체성을 과시하는 움직임과 포즈는 낯선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어지는 춤은 삶의 행적을 축약해 보여주는 듯하다. 갓난아이처럼 엎드려 기고, 그러다 벌떡 일어나 두 팔을 높이 들고 휘저으며 걷기도 한다. 다시 주먹 쥔 손을 바닥에 붙이고 짐승처럼 기어서 이리저리 오가다 쓰러져서 뒹굴고 몸부림치기도 한다. 지나온 한평생을 반추하는 듯한 춤에는 삶의 회한과 고달픔이 짙게 묻어 있지만, 그와 달리 노동으로 다져진 강인한 육체성을 뽐내기도 하는 춤이다. 솔로 춤이 펼쳐질 때 나머지 3명의 춤꾼은 무대 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소품들을 하나씩 챙겨 무대 뒤 벽면에 설치된 패널에 붙인다. 옷가지나 신발 등 몸과 밀착된 것들로, 이것들은 몸이 살아온 삶의 흔적일 것이다.

우리에게 과거 전체가 남아 있다면 그것은 어떤 정신이나 관념의 형태가 아니라 몸적 기억일 것이다. 스피치 씬에서 춤꾼들은 그런 몸의 기억을 들춰낸다. 춤 만든 이들의 의도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가부장적이고 무뚝뚝했던 아버지의 등과 꼭 닮은 자기의 등에 관해 얘기하면서 힘겹게 무대를 한 바퀴 도는 춤꾼은 짐을 지는 등, 삶의 무게를 감당하는 등을 현시하면서 힘들었던 지나온 인생을 되새김질한다. 또 다른 춤꾼들은 휘어진 팔과 뒤틀린 허리, O자 다리 등 고장 난 몸과 몸에 대한 아픈 기억을 얘기한다. 또 발과 손목, 얼굴 등에 새겨진 사고 이력과 척추 질환 등 크고 작은 몸의 질환에 대해 말하면서 때로는 혼자 그러다 함께 춤을 추면서 괴로운 기억을 발화한다. 나는 내 몸이다. 우리는 삶과 인생을 몸으로 산다. 몸으로 살다가 죽는다. 곧 죽음은 신체적 죽음이다.






고스트그룹 〈희년연구〉 ⓒ고스트그룹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 몸의 죽음을 바라보는 춤 만든 이들의 시각은 독특하다. 다음 대사가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까닭이다. “인간과 바바나의 DNA는 60% 일치한다. 우린 60% 바나나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주근깨가 많아진다. 주근깨의 어원은 죽은 깨이다. 죽은 자의 원자가 태양에 닿았다가 다시 지구로 돌아와 자기의 얼굴에 앉아 주근깨가 된다.” 우주 만물은 뒤섞여 존재하고, 한 사람의 신체에는 과거 사람들의 원소뿐만 아니라 온갖 원소도 섞여 있다는 말이다. 삶과 죽음은 순환적 고리를 이루고 있는 ‘하나’, 그래서 죽음은 곧 ‘하나의 생명’으로 회귀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다. 그래서인가. 무대 천장에 매달린 영정 속 얼굴들은 찡그리는 등 갖가지 표정을 짓다가, 미소를 머금고 웃기도 한다.






고스트그룹 〈희년연구〉 ⓒ고스트그룹




거울 놀이 장면과 이어지는 영상 이미지 씬에서는 삶과 죽음의 순환적 관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의미를 성찰하게 하는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목재가 삐거덕대는 소리와 거울이 퍽하고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소리, 윙윙거리는 듯한 음향과 함께 행해지는 퍼포먼스에서 춤꾼들은 관의 4면을 이루는 4개의 직사각형 패널을 각자 하나씩 들고 여러 가지 기하학적 도형을 만들어 보여준다. 그러다 그것을 관처럼 짊어지고 기어가다가, 4개의 패널을 쌓아 상여처럼 만들어 다 같이 들고 장례 행렬이 가듯 천천히 걸어서 퇴장한다. 이를테면 거울 놀이는 출상(出喪)하기 전날 밤 상주를 웃기고 위로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빈 상여를 메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노는 놀이인 상여놀이의 현대판 버전인 셈이다.

그런데 거울 놀이 씬에서 몸은 해체되고 분해되는 것처럼 보인다. 거울이 이곳저곳에 놓이는 위치에 따라 춤꾼들의 몸은 부분적으로 거울에 투영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몸은 형체 없이 흩어지며 영상 이미지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강하고 빠른 비트의 음악과 함께 무대 전체는 영상 이미지로 뒤덮인다. 바람이 불어오듯, 물결이 치고 파도가 밀려오듯, 또는 운무가 깔리고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듯 무대 전체는 영상 이미지로 넘쳐나는데, 이 모습은 마치 모든 형체 있는 것이 녹아내리면서 우주 만물의 온갖 원소가 한데 들어 합쳐지는 형국이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영정 사진에 담긴 4명의 얼굴이 투사되어 이 이미지들과 뒤섞인다. 얼굴 형상은 일그러지고 찌그러져 다른 이미지들과 하나가 된다. 인간의 몸이 죽어 만물과 하나가 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고스트그룹 〈희년연구〉 ⓒ고스트그룹




죽음의 문제는 한 창작자의 창작행위가 응축되는 결절점이자 그 창작의 특색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죽음은 만만한 주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기에 죽음에 관한 의미 있는 해석은 깊은 인문학적 성찰을 요구한다. 주지하듯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한편으로 죽음은 생명이 없는 무기물로의 퇴행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생명체와 그 밖의 우주 환경은 존재론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죽음은 비유기적인 생명, 곧 하나의 생명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생명체와 그 밖의 우주 환경은 서로 생명 에너지를 주고받는다. 죽음은 새로운 삶(생명)을 위한 한 과정이며, 삶과 죽음은 별개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번 공연의 영상 이미지 씬은 죽음이 하나의 생명으로 돌아가는 창조적 회귀 운동이라는 관점을 잘 표현하고 있다.

다음 장면에서 춤꾼들은 주로 원을 그리며 돈다. 상수 뒤쪽에서 남성 춤꾼들이 기어서 나오고, 그들의 등에는 여성 춤꾼과 천사 인형이 각각 놓여 있다. 그리고 나머지 여성 춤꾼 한 명이 그 뒤를 따라 기어서 나오다 무대 중앙에 이르면 춤을 춘다. 기어가는 남성 춤꾼들은 하수 뒤편에 세워진 관 혹은 병풍을 한 바퀴 돈 뒤, 둘이서 등에 올라탄 여성 춤꾼을 들고나와 무대 중앙에 내려놓고 그 주위를 뛰어서 빙빙 돈다. 그리고 급기야 모든 춤꾼이 뛰어서 무대를 빙빙 돈다. 혼자서 돌기도 하고 둘이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다가 서로 파트너를 바꿔서 손을 맞잡고 돈다. 그들의 운동과 운동 선은 삶과 죽음의 순환 고리를 형상화하는 듯, 주로 원을 그리고 있고, 또한 퍼포먼스는 삶과 죽음의 순환적 생성 운동을 축복하듯 밝고 경쾌하다.




고스트그룹 〈희년연구〉 ⓒ고스트그룹




마지막 장면은 인상적이다. 4명의 춤꾼이 무릎을 꿇은 채 엎드려 있다. 춤꾼들은 딱딱한 물체를 두드리는 듯한 둔탁한 음향을 배경음으로 삼아 단순하고 기계적인 움직임을 반복한다. 일어날 듯 말듯 허리를 들었다 숙이고, 그러다 일어나 허리를 곧추세운 채 한발을 뒤로 쭉 내밀고 두 팔을 들어 손바닥을 마주치고, 두 손을 바닥에 집고 두 발을 뒤로 쭉 뻗어 빠르게 교차하고, 드러눕고, 바쁘게 걷고, 몸부림치는 등 단순하고 기계적인 동작을 반복한다. 천편일률적으로 살아온 몸의 일평생을 몇 개의 단순하면서도 빠른 동작에 집약해 보여주는 듯하다. 이윽고 조명 불빛이 완전히 사라지지만, 컴컴한 어둠 속에서도 그들은 그치지 않고 억세고 힘차게 움직인다. 잠시 후, 다시 조명 빛이 들어오면 그 몸들은 모두 무대 바닥에 엎어져 있다. 반복되는 일상의 삶과 노동에 치여 쓰러지거나 죽은 것이다.

격렬하게 살다 쓰러진/죽은 몸들은 소진된 몸으로 보인다. 그런데 소진된 몸은 피로한 몸과 다를 것이다. 피로한 몸은 힘에 부치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몸이다. 이 몸은 그때그때 휴식을 취하면서 일상의 노동을 반복할 수 있다. 피로한 몸은 똑같은 삶을 무한히 반복하는 몸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소진된 몸은 에너지 0의 몸,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몸이다. 하지만 이 몸은 자본주의적인 삶과 완전히 단절하는 몸이며,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죽은 몸이다. 그러니 소진된 몸은 자유와 해방을 만끽하는 몸이 아닐까. 고스트그룹의 〈희년연구〉는 소진된 몸 혹은 몸의 긍정적 죽음을 춤과 스피치, 퍼포먼스와 영상 이미지, 그리고 갖가지 오브제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알맞게 장면화한 매력적인 공연이었다.

최찬열

인류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여러 대학과 대학원에서 춤과 공연예술, 미학과 관련된 과목을 강의했다. 지금은 몸의 예술과 인문학에 기반한 통섭적 문화연구에 몰두하며, 춤문화연구소에서 미학과 춤 역사를 강의한다.​​

2022. 7.
사진제공_고스트그룹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