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젊고 푸른 춤 벗나래들 3
무엇으로 춤출 것인가
채희완_춤비평가, (사)민족미학연구소 소장

사람은 왜 춤을 추는가.

이 질문은 사람은 왜 사는가라고 느닷없이 묻는 것처럼 당혹스럽지만 춤에 관한 가장 원초적이고 또 궁극적인 물음입니다.

살아 있기에 춤춘다.

그 물음에 그 답변이랄까, 허름한 듯도 싶지만 그 말 속엔 그 역(逆)으로서 ‘춤을 추기에 살아있다’는 뜻이 깊숙이 깔려있습니다. 그런 만큼 사람 사는 것과 춤추는 것 사이엔 서로 적극적으로 필요하고도 또 충분한 교호조건을 이루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제대로’ 살아있도록 하는 생명의 자기충일의 욕구 때문에 춤추는 것입니다. 춤만큼 살아 있음을 스스로 확인시켜 주는 문화예술 장르가 있을까요?

우리는 때로 ‘새가 노래하고 파도가 춤춘다’고 말하지요? 그저 새가 지저귈 뿐이고 파도가 물결칠 뿐인데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거기에 움직여서 그것을 그렇게 그려내도록 만든 주관적 정서가 어리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엔 사물의 모습을 의인태로 보는 관습적 이성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주객 분리에 따른 일방적인 접근이 아니라 사물이나 현상을 살아 있는 것으로 보고, 대상 자체의 자기 생성활동과 인식 주체의 자기 생성활동을 일치시켜 동시적인 상호관계 속에서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물결치다’와 ‘춤추다’, ‘지저귀다’와 ‘노래하다’ 사이를 가르고 이동시키는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물결치다’와 ‘춤추다’는 ‘움직이다’라는 공통성이 있지만 그 질적 의미는 다르지 않습니까? 단순히 움직이는 그 이상의 어떤 유동적인 기운(氣韻)에 품기우고 감싸여 살아 생동하고 있을 때 우리는 ‘물결치다’는 말로는 미흡하여 ‘춤추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춤추고 노래하는 원천동기인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철학적 인간학 또는 생태과학적 인문학의 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쿠르트 작스(Curt Sachs)는 자신의 책〈춤의 세계사〉서문에서 춤춘다는 것은 “한 단계 고양된 삶일 뿐(only a life in a higher level)”이라고 말합니다. 삶은 삶인데 그저 밋밋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의 개체적 삶이 ‘제대로’, ‘저 나름대로’, 더 나아가서 ‘제 멋대로’ 사는 삶이란 뜻이어서 일차적으로는 삶이 본래의 제자리를 잡는 것이고, 개체 삶의 본연적 자기정위(定位)가 바로 춤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춤은 존재 이전의 생성이고, 존재의 자기실현이고, 자기창출, 자아향유이기도 합니다. 그는 그 책 서문의 첫머리에서 “춤추지 않고서야 어찌 인생(the way of life)을 알리요”라는 옛 잠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거꾸로 하면 춤추는 사람이어야만, 춤을 추어야만 인생의 맛과 멋, 그리고 의미와 깊이를 얻게 된다는 것이지요. 춤은 그만큼 삶의 끝없는 도정(道程)이고 또 사람 사는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기도 합니다.

“살아 있기에 춤춘다”는 말에서 ‘살아 있음’이란 다음 세 가지 뜻을 두루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째, 살아있음은 먹고사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물적 토대를 기초로 한 존재의 일차적 규정으로서, ‘생존(生存)’을 말합니다. 개체보존과 종족 보존이라는 생체적 본능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사람은 춤추어 왔습니다. 특히 원시시대의 춤은 삶의 필요불가결한 존재였고. 살기 위해 춤추었고 춤을 추기에 살 수 있었습니다.

둘째, 살아있음은 존재의 활동규정으로서 존재의 역동적 활성화, 활력, 활기인 ‘생활’(生活)을 뜻합니다. 여기서 사람은 자연 본능적 존재를 넘어서 노동가치를 창출함으로써 더욱 인간화된 존재활동이 마침내 추구해마지 않는 진선미성(眞善美聖)의 가치를 실현해 내지요. 그리고 나아가 자유, 민주, 평등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성취해내고 이에서 역사와 문화의 질을 얻게 됩니다. 이를 위해 사람은 또 춤을 추어 왔습니다. 특히 역사변혁의 도도한 물결은 마치 거대한 축전의 현장인 양 역사의 광장에 운집한 이들이 떼춤(군무)을 이루는 춤마당으로 자주 묘사되어 왔던 터입니다.

마지막으로 살아있음은 ‘생명’(生命)입니다.

생명은 존재의 가치활동을 본원적으로 가능케 하는 생성에너지원으로서 생존, 생활 등 살아있음의 여러 의미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생명이란 사람을 포함하여 삼라만상 모두가 세계사적 존재로서 공생, 협동하는 유기적 생체에너지의 전일체(全一體)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매단계마다 춤은 깊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춤이란 삶과 직결되어 있으면서 단순한 생존적 차원만이 아니라 삶의 길이 마침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적인 단계로의 무한한 도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적 삶이 궁극에 도달하고자 했을 때에야 거기서 비로소 열리는 무극대도(無極大道)의 시원(始源)입니다. 그러기에 춤은 ‘활동하는 무(無)(김지하)이고 ‘움직이는 도(道)(이애주)인 것입니다.* 처음과 마지막이 끝내 물고 물리며 돌아가는 궁궁을을(弓弓乙乙)의 무궁한 시간 속에서 춤은 보이지 않는 질서의 드러남입니다.

그처럼 춤은 원초 생명의 자기확인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러한 생명의 자기확인이란, 하나의 생성적 존재라는 것이 개체적인 존재자일 뿐 아니라 다른 무엇과 유기적인 연관관계를 맺고 있는 협동적인 존재자임을 스스로 확인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돌덩이 하나에도 그 자체 영성적인 마음이 있어 유동하는 한 생명체로서 사람과 서로 교류하면서 우주진화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가이거 가설’이나 네오 휴매니즘과 연관됩니다. 이는 풍류도의 접화군생(接化群生)의 현대적 해석과 그대로 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러한 신령함의 자기생성활동이 춤이기에 춤추는 것만큼 거룩하고 풍요로운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싶습니다.

댄스(dance)의 어원인 산스크리트어 ‘Tanha’의 뜻이 또한 그러합니다. 원래 댄스는 뛰는 춤, 도약의 춤, 환희의 춤만을 지칭했는데 어느새 춤 일반을 통칭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Tanha’의 원래 뜻은 ‘환희용약’(歡喜踊躍), ‘생명력의 충일’이라고 한다지요? 공동체적 생명 에너지의 충일이자 자기확장인 ‘Tanha’의 어원 자체가 이미 춤과 생명의 관계를 잘 예시해 주고 있습니다.

춤은 생명력이 흘러넘치는 살아 생동하는 것이어서 언제나 죽음이나 죽임의 상황에 대결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만큼 적극적이고 쟁투적인 삶입니다. 춤은 온갖 반(反) 생명에 대해 대항해 왔습니다. 우리는 춤출 수 없도록 사회체제를 몰고간 중세(中世)시기에 춤추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춤추다가, 죽어서야 춤이 그치는 ‘죽음의 춤’과 ‘무도병’의 역설적 사회 병리현상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춤출 수 없게끔 만드는 죽음, 죽임의 세력에 대항하는 춤이야말로 춤의 가장 강력한 주제가 될 것입니다. 반생명을 척결하고 살아있음에 겨워 신령스러움의 생성활동인 엑스타시를 체험하는 여기에서 우리의 독특한 신명론이 제기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죽임인 살을 풀어헤쳐 물리치는 ‘살풀이’ 과정에서의 한 극점이 바로 ‘신명’입니다.

자연 생태계가 인간에 의해 파괴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춤추지 않는 바다를 대신하여 춤추고,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 새들을 대신하여 노래하는 신성한 의무를 지닙니다.

젊고 푸른 춤꾼 벗나래들,
사람은 무엇으로 어떻게 춤출 것인지를 곰곰 생각해보기로 하지요. 춤으로 무엇을 춤출 것인가를.



* 김지하 시인 특유의 표현으로 〈민중문학의 형식문제〉,『남녘땅 뱃노래』, 두레출판사, 1985.에서 처음 언급되었고 나중 그의 말이나 글에서 심도있게 논구되어 왔다. 이들 용어는 ‘텅빈 자유’ 또는 ‘초월적인 것이 창조적으로 활동하는 자유’라고도 일컫는다. 이 때 無나 道는 ‘늘 시원이 되는 그곳’으로서 자유 해탈의 제공처가 된다. 이러한 ‘활동하는 무’가 창조적 진화를 추진한다.

채희완

부산대 명예교수, 〈(사)민족미학연구소〉 소장, 〈부마항쟁기념사업회〉 이사, 〈창작탈춤패 지기금지〉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 『공동체의 춤 신명의 춤』, 『한국의 민중극』(엮음), 『탈춤』, 『한국춤의 정신은 무엇인가』(엮음), 『춤 탈 마당 몸 미학 공부집』(엮음), 『지극한 기운이 이곳에 이르렀으니』 등을 펴냈고, 그밖에 춤, 탈춤, 마당극, 민족미학에 관련된 논문과 춤 비평문이 있다.​​​

2022. 7.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