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능동적 선택으로 춤 강좌 관행이 달라졌다
춤 아카데미 탄츠스테이션과 미나 유 교수

 

 

서울탄츠스테이션(Seoul Tanz Station)은 무용학원 운영 방식에 새 개념을 도입하였다. 여기서는 월 수강료를 선납하는 방식보다 1회용 쿠폰으로 개별 강좌를 수강하는 방식이 중심을 이룬다. 게다가 월 수강료 방식으로 선납하면 수강료가 매우 저렴해진다. 이곳은 무용학원이 아니라 규모가 큰 춤 강좌 센터이다.

서울 신촌에 탄츠스테이션이 개장한 지 2년을 앞두고 있다. 매주 휴일 없이 100여 강좌가 제공된다. 춤에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탄츠스테이션으로 몰려들고 있다. 주중에 날마다 수백 명이 춤을 수련하러 신촌으로 간다. 신촌은 상업 지역이고 주거 지역은 아니므로 탄츠스테이션에서 춤을 수강하는 사람들은 신촌 바깥에서 올 것이다.

탄츠스테이션은 신촌 로터리 다섯 갈래 간선도로에서 시청 쪽 길로 300미터 가다 보면 왼쪽에 위치해 있다. 옛날 신영극장은 세월이 흘러 아트레온으로 모습을 바꾸었고, 아트레온 13층에 탄츠스테이션이 있다. 13층 전체 공간을 3개의 스튜디오와 로비 및 휴게 테라스로 개조한 곳에서 탄츠스테이션이 운영되고 있다.

소개에 따르면, 탄츠스테이션 운영의 주축은 아트 코디네이터 강혜련씨(경기대 교수)와 크리에이티브 어드바이저 미나유씨이다. 매니저와 관리 직원은 7명이다. 10월 중순 탄츠스테이션 운영을 주제로 해서 가진 인터뷰는 미나유와 함께 진행하였다. 탄츠스테이션 운영을 주제로 한 이번 인터뷰에서 무용원 교수를 퇴임한 미나유의 근황은 물론 개인사도 도중에 들을 수 있어 함께 정리 소개한다.(이번 인터뷰에는 탄츠스테이션 매니저 손혜인씨가 배석하여 운영 관련  데이터를 조언해주었다.) 


 

 

사회: 서울탄츠스테이션 개원 때부터 깊숙이 관계하신 줄로 아는데, 우선 강사진의 한 사람으로 클래스를 진행해오신 소감부터 듣고 싶다.

미나 유: 다양한 분야 사람들이 수강한다는 느낌부터 전하고 싶다. 무용인은 물론이고 조각 전문, 영양사, 연출자, 전자공학도 등 다양한 사람들도 수강한다. 그런 사람들한테 배워 얻는 점도 있다. 나의 클래스에는 40명 정도 등록한 가운데 10명 정도는 타 분야 사람들이다. 개인적으로 이제야 한국을 아는 듯한데, 정말 우리 주변에 춤 좋아하는 사람 많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사회: 무용원 퇴임 후 탄츠스테이션이 유 교수의 새 직장이 된 것 같다.

미나 유: 무용원에 있을 때는 그러질 못했는데, 지금은 국민대, 한성대, 성대 학부와 대학원에 출강하고 있어서 사실 예종에 있을 때보다 더 바쁘다. 1주 2회 드럼을 학습하고 주말에는 집에서 드럼을 연습한다. 드럼을 사두었다.



"탄츠스테이션 강좌는 자시 시간을 스스로 갖고 자기 투자로 이뤄지므로
주체성과 능동성, 열정이 돋보인다"

 


 

 

 

 


 

 "계속 잘 가르치기를 긴장할수록 그만큼 수강생이 많이 모이지 않겠는다...
입시 위주 학원은 이런 열기를 소화하기 어렵다" 

 

사회: 유 교수는 나이 70을 앞둔 원로 무용가로서 제 개인적으로는 공연장에서 가장 자주 보는 무용가이시다. 젊은이 못지 않은 열의가 엿보이는데, 그럴 적마다 원로 무용가로서 그렇게 자주 공연장을 출입하는 속내가 궁금하였다. 이런 궁금증도 풀 겸해서 그간 걸어오신 길을 듣고 싶다. 우선 미국으로 가게 된 동기부터 소개해주셨으면 한다.

미나 유: 1971년 뉴욕 죠프리 발레 스쿨로 진학하였다. 당시 ‘댄스 매거진’에서 죠프리발레단의 일본 순회 공연 기사를 발견하고 끌린 것이 계기가 되었다. 2년 정도 죠프리 발레 스쿨에 체류하였는데, 제가 발레 전공이 아니라서 현대무용으로 나갈 길을 찾고 있었다. 죠프리 발레 스쿨에서 수학할 당시 어느 날 단원들이 어디로 간다고 수선을 떨길래 물었더니 뉴욕 업타운에서 있는 오디션에 간다고 하더라. 그래서 따라갔더니 하크니스 발레 스쿨 오디션이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오디션에서 합격한 사람은 나 혼자였다. 여기서는 전액 지불 장학생으로서 의상비와 티켓 비용 등 생활비까지 받았다. 훗날 이야기지만 하크니스의 디렉터 데이비드 하워드의 말이 “쥬디스 재미슨에게서 뭔가를 봤듯이 너에서도 봤다. 굳이 발레가 아니더라도 뭔가를 남길 것 같은 기대에서 당신을 선발했다”고 하더라. 하크니스 발레 스쿨을 7년 정도 들락거렸다. 다른 무용단 활동과 하크니스 생활을 병행하고 하크니스 패컬티로도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인연이 닿아 활동한 무용단이 엘리오 포마레(Eleo Pomare) 댄스 컴퍼니였는데, 사실 내 판단으로는 앨빈 에일리보다 더 예술성 있었다.

사회: 엘리오 포마레(1937~2008)는 콜롬비아 출신 미국 이민 1세대 흑인 무용가이고 흑인의 시각을 매우 강조한 인물로 아는데...

미나 유: 흑인 사회에서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정치적 백그라운드를 업고 정치적 딜을 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런 인물을 만난 것은 결국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현대무용에서 흑인을 내세우고 강조하는 그를 달가워할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지원 같은 것을 별로 받지 못하였지만 1970년대 초반 큰 그랜트를 받았다. 이 단체가 그랜트 수혜작 작품 ‘레드 맥베드(Red MacBeth)’를 준비하던 시기에 죠프리발레단 사람 권유로 그 작품 준비 과정을 보러갔다. 그날 엘리오포마레무용단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엘리오 그리고 매니저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는데, 두 사람 눈이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자기들이 찾던 분위기의 주역이 우연히 나타났던 것 같은데 결국 주역으로 발탁되었다. 그 공연 다음날 뉴욕 타임스에 대문짝만한 리뷰가 실린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모른 채 나는 그레이엄 스쿨로 갔는데 학교 전체를 그 리뷰로 도배를 했더라. 학교 스튜디오에 들어서니 프리마 돈나 왔다고 난리도 아니었다. 이 리뷰 덕분에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 작품에 출연하면서 매우 힘들긴 하였었다. 내가 한국에서도 현대무용보다는 한국무용과 발레를 한 데다가 말도 잘 못 알아듣고 해서 그가 원하는 연기력이 나오지 않으니까 엄청난 압박을 주었다. 엘리오가 바닥에 토마토를 던지면서 토마토가 확 터지는 순간을 보여주면서 너가 이렇게 춤추기를 바란다고 했다. 계란을 던지지를 않나 땅콩을 뿌리면서 그런 폭발력을 기대한다는 거였다. 나는 계속 울었고 단원들이 엘리오에게 너무 한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아무튼 미국 현지인들이 못해 내던 것을 해냈으니까 누레예프나 바리시니코프가 시민권을 받지 않았나. 나 역시 그러하였다. 미국 유학 갈 때 집에서는 3년 정도 학비를 대줄 셈이었는데, 석달 쯤 지난 후론 스스로 해결한 편이었다. 그후 세월이 지나 내가 서울 국제현대무용제에서 공연했을 때 엘리오 포마레가 손수 지은 의상을 제공해주었다. ‘인삼 여인’이라고 부채 갖고 재즈로 추었다. 그리고 앨빈에일리무용단에 한 3년 있었는데, 활발한 무용단 아닌가. 무용원 재직 중에는 그러질 못하다가 퇴임하고부터 초빙받았다. 그래서 2006년작 ‘블러바드’의 저작권료를 받고 2011년 여름 1년간 앨빈 에일리 무용단이 공연하였다. 흑인들의 분위기가 나름 독특하였다.

 

 

 

"그 공연 다음날 그 사실을 모른 채 학교로 갔는데 이미 프리마 돈나가 되어 있었다"
 

사회: 미국에서 무용가로 입신한 상황이었을 텐데, 독일에는 왜 가셨는가?

미나 유: 1985년 독일 뮌헨으로 갔다. 미국에 가서 처음 10년간은 뉴욕에 완전히 미친 편이었다. 그러나 뉴욕에서 혼자서 중얼대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고, 또 수퍼마켓의 누런 종이 봉투를 들고 회색 빌딩 숲을 어슬렁대는 사람들을 보고 어느 순간 소름이 꽉 끼쳤다. 말하자면 뉴욕에서 고독과 비참을 느껴 떠났던 거다. 나도 뉴욕에 계속 있다 보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1984년 뮌헨의 제시카 이반슨 학교가 뉴욕 스텝에 와서 오디션을 가졌는데, 다른 미국 무용수와 함께 뽑혔다. 사립으로 큰 학교인데 요즘은 테크닉 위주 교육을 한다. 한국 오기까지 이반슨 학교 단원과 패컬티로 활동하였다. 뮌헨이 보수적이어서 발레 쪽은 괜찮은데 컨템퍼러리 쪽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른 도시로 들락거렸고 스위스, 장기간 헬싱키로 가기도 하였다. 그런데 제시카 학교에서는 나에게 완전한 자율성을 보장해주었다.

사회: 무용원에 부임하게 된 계기라 할까 그런 것이 있다면 듣고 싶다.

미나 유: 1995년 가을 대구시립무용단 객원 안무 중에 무용원에서 교수 초빙 건으로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춤추는 것이 너무 좋았고 학교에 매이면 자기 생활이 없어질 것 같고 자기 비결이 공개될 것 같아 그 제안을 거부하였다. 그런데, 운명인지, 한국 공연을 끝내고 뮌헨으로 가니까 정신과 의사인 남편이 이렇게 토로하더라. 그 사람 말이 너한테 춤은 잠시도 쉬지 않으면 안 되는 공기인 것 같은데, 춤이 당신에게 그토록 심각한 것인지 몰랐다고 하였다. 나로선 공연에 빠져 집을 비우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제는 더 춤출 곳으로 가도 좋을 것이라고 했다. 무용원에서 제안도 받았고 남편의 솔직한 마음도 듣고 보니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아서 2달 동안 인도를 여행하였다. 사이바바 도인의 센터에서 나름 해답을 얻었다. 한국으로 가야겠다고.

사회: 무용원에 재직하며 ‘블러바드’ 등 여러 안무작을 남기셨는데...

미나 유: 나는 무용원 부임 이후 작품을 만들었어도 무대에 한번도 서지 않았다. 커튼콜에서조차 나서지 않았다. 기질상 밝은 데 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대에서 많은 사람 주목을 받는 것도 그다지 끌리는 일이 아니었는데, 거기다 조명까지 강렬하니까 커튼콜을 꺼리게 되었다. 지하에서 드럼 연습을 좋아하는 것도 그런 기질이 작용한 것일 테고 무용원에서도 강의 실습실 조도(照度)를 낮추는 편이었다. 사족이지만, 음악을 너무 크게 틀고 조명도 강한 세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 스스로 문 열었고 나 스스로 문 닫고 나갈 거다. 나는 아직 문을 닫지 않았다"

사회: 무용원 정기공연에서나 LDP 공연에서나 커튼콜에 나선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오늘 그 궁금증이 풀린 것 같다. 말하자면 오늘 ‘커튼콜을 않는 프리마 돈나’와 인터뷰하였다. 무용원에 근 15년 재직하고 퇴임하신 입장에서 소감이 없을 리 없다고 본다.

미나 유: 무용원과 국내 춤계 신세대들을 위해 두 가지 의견만 밝히고 싶다. 먼저, 지금 무용원은 16년전의 무용원과는 다르다. 그때는 무용원이 대학이 아니다는 오해와 편견이 많았고, 고등학교 상황도 그래서 기본기가 안 된 입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기본을 집중 가르치는 데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리 잡았고 기본이 된 아이들이 들어온다. 설령 기본이 없다 하더라도 이제 자리잡은 무용원 체제에서 4년을 집중 교육하면 원하는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미래의 가능성을 보고 뽑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당시는 실기를 많이 했어야 했는데, 그 시절은 지난 것 같다. 더 강하게 말하자면, 무용원은 예고가 아니다. 이제는 월등한 학생들이 입학하니까 다른 공부도 시켜야 한다. 특히 발레든 현대무용이든 간에 컨템퍼러리 댄스는 교육 방식이 달라야 한다. 방과 후에는 밖으로 나가도록 풀어줘야 한다. 학생을 믿고 자율을 늘여줘야 할 것이다. 자율을 늘이면 재학생들이 풀어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들지 모르겠고 모두가 다 잘 하길 기대하는데도 기대에 못 미치는 학생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잘 하려는 소수 재학생이라도 제대로 잘 하도록 하는 환경을 무용원은 잘 생각해야 할 것이다. 모두가 인재가 되면 물론 바람직스럽겠는데, 제대로 인재가 될 재목을 희생시키는 것은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다. 아무튼 재학생들을 과감하게, 대담하게 믿고 맡기면 거기서 옥석이 가려질 것 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여태까지 무용원에서 배출했던 댄서와는 또 다른 스타일의 댄서도 나오기를 기대한다.

사회: 무용원에 재직중인 한 사람으로서 애정어린 충고에 감사드리며 무용원에서도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개선 방안을 모색하기를 기대하고 싶다. 그리고 국내 신세대들에게는 어떤 충고를 해주실 수 있는가?

미나 유: 기다리면 답이 나오는데 성급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대단한 것과 소중한 것 간의 차이를 알아야 할 것이다. 지식은 뚜껑을 열고 5분만 지나면 낡아지는데 지혜는 언제나 신선하다. 지식과 지성을 구분해야 한다. 감동 없는 인간이 예술을 해낼지 의문이다. 예술은 감동이 핵심이다. 모든 것을 혓바닥으로 해결하려 하고 그런 사람이 잘 되는 풍토를 이겨내며 묵묵히 준비하는 사람이 절실하다. 복제를 남발하고, 겹치기 출연이 심한 듯하다. 대체로 생활이 어려운 줄로 알지만, 그래도 그것을 핑계로 삼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다. 명배우는 1회 1작품을 준수한다. 작품 출연 이후 휴지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물론 한 작품을 끝내고 그 여음(餘音)이 남는 시간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사회: 말씀 감사드린다. 계속 춤계 현장에 계시는데, 앞으로 개인적으로 어떤 뜻을 실현하고 싶은가?

미나 유: 탄츠스테이션에 관계하더라도 여름철 7, 8월에는 해외 체류하며 나 자신을 다듬는다. 아직도 작업하고 싶다. 물리적 퇴임은 있어도, 예술적 퇴임은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방학마다 나가고 준비한다. 내 사전에 퇴직·퇴임은 없다. 나 스스로 문 열었고 나 스스로 문 닫고 나갈 거다. 나는 아직 문을 닫지 않았다.

 

2012. 1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