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오래오래
코로나19 이후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들
김채현_춤비평가

코로나19가 나를 비켜갈까

코로나19가 세계를 휩쓰는 중이다. 허구한 날 ‘집콕’이 삼시세끼 챙기기에도 인내가 따라주어야 한다. 두시두끼라 해서 사정이 다를 것 같지도 않다.
 언제 마무리될지 예측키 어려운 시기에, 코로나19 방어 요령은 시즌 필수 팁이 다. 확진 판정을 받고도 자전거 타고 광폭 여행하는 철부지 사례가 더 이상 보도되지 않는 걸 보면 그 팁들이 뿌리를 내렸다는 뜻이겠다. 그래도, 정도가 지나쳐, 과학적 근거가 의심스러운 팁들이 사회 어느 모퉁이에선 나도는 모양이다. 소금물로 코로나19를 예방할 수 있다는 말도 솔깃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면 이다지도 간단한 처치법을 중국 우한의 의료진들이 몰라서 그곳 집단 감염이 폭증했단 말인가. 이렇게 초보적인 의문을 잠깐이라도 품었더라면… 실제 소금물로 집단 발병 화근을 키운 행동은 모두를 우울케 한다.
 애당초 그것은 중국 우한을 맴돌 역병(疫病)일 줄 알았다. 예상을 뒤엎고 국경을 넘나드는 그 역병으로 앓는 사람을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탈리아에서는 밝혀진 확진자의 10분지 1이 생명을 잃는다고 하니 건강상태에 따라선 듣기만 해도 송연한 재난이다. 우리가 메르스 학습 효과가 있어서 경계를 세웠으니 망정이지 사람들 간에 거리 두기나 모임을 경시하였더라면? 그 다음 수순은 아마도 대파국이 아니었겠는지, 모를 일이다.
 재난이 지역, 성별, 연령, 계층, 지명도, 인종 그리고 나라를 가릴까. 경우에 따라서는. 대한민국 어느 도시의 빈촌엔 약국도 없어 하루 몇 차례 시내를 오가는 버스를 타고 가야 마스크를 구할 수 있다는 소식이다. 전수조사해 보면, 어디 그 빈촌 한 곳만의 일이겠는가. 그 역으로 경제력이 있고 접촉이 잦아서 재난과 가까워지는 경우도 있다. 부분적으로 재난은 지역과 계층에 따라, 단적으로 자본력에 따라 침투하는 정도가 달라진다.
 그렇더라도 재난이 인간이 정한 임의의 구분 기준을 준수하므로 특정 지역의 특정 계층인 자기는 비켜갈 거라고 과연 누구라서 태연할 수 있을까. 특히 개별적 이동이 중구난방인 속도의 시대에 전염병 같은 대재난 앞에서 차이와 차별과 경계는 무색해진다. 대지진, 코로나19 같은 대형 재난일수록 만민평등과 같은 말부터 떠올리도록 한다. 재앙을 목전의 확실한 대참사로 들이밀기 때문에 대재난 앞에서 평소와 다른 마음이 많아지는 것은 불가피하다. 동시에 재난이 벌어지는 사이사이에 의외의 생각과 행동들이 모습을 나타낸다.


재난의 불가예측성

2001년 9월 11일 아침 2대의 여객기가 뉴욕의 110층 쌍둥이 빌딩과 충돌해서 붕괴시키던 9·11 테러 순간, “소방관, 경찰관들이 긴급 도착하기 전에 빌딩 안의 사람들은 서로 돕고 구조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아예 작동을 멈추고 건물 잔해가 눈앞을 가리듯이 떨어지며 초고층 빌딩 붕괴가 촉급하던 그 아수라장에서 말이다. “69층에서 근무하던 어느 하반신 마비 회계사는 대피용 의자를 이용하여 사람들의 도움으로 대피했고, 65층에서 근무하던 어느 소아마비 생존자는 좁은 계단 오른쪽으로 붙어 빈틈을 만들려고 애쓴 사람들과 함께 빌딩을 빠져나왔다.” 그날 쌍둥이 빌딩에는 2만 5천명이 있었고(사상자 2603명) “수천 명이 일시에 쏟아져 내려올 동안 소방관들은 계단을 타고 올라갔고, 올라오는 소방관들에게 사람들은 빨리 나가라고 외쳤다.”(이상 요약 발췌: 〈이 폐허를 응시하라〉, R. 솔닛 지음, 정해영 옮김, 펜타그램, 2012. 이하 동일)




  

2001년 9·11 테러로 붕괴하는 쌍둥이 빌딩(좌), 9·11 테러 다음날의 쌍둥이 빌딩(우) ⓒLJStar




 지금 코로나19 방역에서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는 의료인과 관계자들, 솔선수범해서 자가격리를 진행하는 사람들, 마스크를 양보하고 선물하는 사람들의 선행이 주변에서 줄을 잇는다. 어느 조직체는 손님 끊긴 식당을 찾아 1인 2백반 사먹기 운동을 펼친다 한다. 그렇다, 이타심과 연대의식은 재난을 이겨내는 원동력이다.
 재난은 간혹 정치 지형을 뒤흔드는 위력도 발휘한다. 1789년의 프랑스혁명은 그 직전 몇 해 동안의 가뭄, 대홍수, 우박, 흉작과 무관하지 않았다. 가까운 현대에는 멕시코에서 그런 재난이 있었다.
 1985년 9월 멕시코시티에서 대지진(진도 8.0)이 일어나 80만 명이 부랑자로 전락하고 사망자가 1만~2만 발생하였다. 대지진 수습 과정에서 있은 일들을 들여다보면 지진 규모보다 더 기가 막힐 법하다. “경찰들이 건물 더미에 갇힌 노동자들을 구조하기보다 장비를 구하려는 공장주를 보호한 악명 높은 사례들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멕시코시티로 급파된 경찰과 군인은 약탈자로부터 재산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많은 경우 그들 자신이 약탈자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온 원조는 유용되었고, 텐트와 물자는 엉뚱한 곳으로 갔다. 지진이 났을 때 대통령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서 그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보였다. 실질적인 생존자 구조는 주로 이웃들에 의해 이뤄졌다.” 이쯤 되면 정부가 과연 필요한지 물어져야 할 판이었다.
 이 대지진으로 멕시코 사람들은 진짜 대단하게 배우게 된다. 학력의 정도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나름대로 코뮤니타스를 만들고 연대감을 나누었다. “시민들은 자기들이 세상을 바꿀 힘을 발견했고 시민사회를 탄생시켰다.” 1929년부터 1당 우위 체제를 견지해왔던 집권 제도혁명당은 대지진 3년 후 있은 대선에서 개표 부정을 저질러 집권을 유지했다는 것이 정설이며, 그 10년 후 멕시코는 마침내 3당 체제로 정치 지형이 바뀌었다. 다시 말해, 70년에 걸친 멕시코의 1당 우위 체제는 대지진을 계기로 붕괴되었다.




1985 멕시코시티지진에서 구조대와 자원봉사자들이 구조하고 있다 ⓒ가디언



1985 멕시코시티지진에서 구조하는 휴먼 체인 - 인간 사슬 ⓒQuartz




 재난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미리 예측할 수 있으면 재난이 아니다. 재난의 불가(예)측성(不可(豫)測性)은 전에 없던 일들이 재난 이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도록 한다.
 코로나19 초기에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코로나19를 기화로 아시아 출신자들을 겨냥한 인종차별적 작태가 보도되었지만, 한 달 후부터 코로나19는 정작 유럽에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코로나19가 재빠른 확산 기미를 보이던 지난 3월초에도 미국 대통령은 “코로나19는 독감보다 심각하지 않고, 매년 많아야 7만 여명이 독감으로 사망해도 사회는 문제없이 굴러간다”고 공언한 바 있다. 뭘 믿고 저러시나 싶게 평소 거친 언행을 자주 비친 그 대통령인지라 놀랄 발언도 아니었지만, 한 열흘 후 미국 국무부는 미국인의 해외여행 전면금지를 공표하기에 이른다. 재난은 자신의 불가측성을 인간이 무시할수록 보란 듯이 더 앙심을 품는 듯하다.


선진국은 무엇?

코로나19 확진자가 유럽과 미국에서 폭증하면서 비로소 전세계는 코로나19에 대해서도 재난의 불가측성을 인정하게 되었지만, 때늦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늦었다고 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 하듯이 급기야 해외의 보건 기구들과 심지어 선진국 정상들까지 한국의 코로나19 방역 선례(善例)에 관해 관심을 기울이고 공개적으로 도움을 청하는 것은 점차 예삿일이 되고 있다. 게다가 코로나19 대피처로서 한국엘 가야겠다는 외국인들도 드물지 않은 모양이다.
 어느 부문에서나 한국의 국제적 기여도가 낮다고 여겨온 한국인들이 이런 뜻밖의 사태 전개에서 자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더욱이 코로나19 진단 비용이 저렴하고 진단 시스템에서 한국이 아마도 가장 선진적이라는 국제사회에서의 중론이 국내에 퍼지면서 한국인들은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의 의료 실태를 얼마간 적나라하게 스스로 인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그간에 품어온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의 국가 이미지를 이번 기회에 혹자처럼 ‘선진국도 별거 아니네’ 식으로 은연중 되돌아보는 것 역시 재난의 불가측성이 한국사회 전반에 불러온 기현상이 아닐까 한다. 좀 배운 사람 중에서도 그간의 선진국 열등감을 벗어나 묘한 해방감을 느낀다는 반응이 있는 것 같은데, 이해됨직한 일이다.
 지금 유럽과 미국, 각 나라들이 겪는 고통의 경위를 보면 실은 아시아를 향한 자기들의 잠재된 우월감에서 스스로 화를 키운 것은 아닌가 싶다. 그 바이러스가 유럽 대륙을 뚫지 못할 것이라는 오만이 있었다면, 그건 토대가 부실한 오만에 불과하였다.
 반면에 한국은 그간 필요 이상의 선진국 열등감에 갇혔던 것은 아닌지 자문해볼 일이다. 흔히 열등감은 발전하려는 의지를 북돋우는 활력소로 선용된다. 그러나 선진국에서 선진 문물을 익힌 사람들이 한국에 돌아와서 그 실체를 제대로 알리기는커녕 선진국 추종자에 머무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보호막 속에서 자신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려고 걸핏하면 선진국을 내세우는 투의 근거가 박약하고 부조리한 열등감은 백해무익할 뿐이다.
 나와 주변은 선진국의 실체를 명확히 공유할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계속 선진국을 잘 알아야 한다는 잠정 결론이 내려질 것 같다. 하지만, 결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선진국을 잘 알아야 하는 궁극 목적은 무엇인가. 단적으로, 나와 우리를 위해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선진국을 잘 알아야 하는 주체는 나와 우리일 것이고, 나와 우리를 중심으로 선진 문물에 대해 다양하면서도 ‘실제에 근거한’ 식견을 함양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 문물에 대한 인식과 선진 문물에 대한 인식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하겠다. 다시 말해서, 선진 문물에 접근하는 패러다임이 손질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진국 무대에 진출하려는 무용인들이 지금 추세로 느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한류, 케이팝, 〈기생충〉 등등이 말해주듯이 춤에서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러한 가능성을 방향성 있게 키워가는 자구책의 일환으로서 나로선 우리의 춤 특성과 현대의 선진 춤 조류를 접목해내는 상상력을 키워볼 것을 강추하겠다. 공연 행사가 줄줄이 취소되고 집콕으로 머무는 등 단기적으로는 고통스러운 코로나19 대란이겠지만, 이후의 도약을 그려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를 비롯 다수의 논문,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 

2020. 4.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