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국립현대무용단의 〈이미 아직〉
현대 한국춤 언어의 부재, 집중된 결속력이 필요





김혜라: 4월 23일 오늘 이 자리는 공연(프레스 공연) 관람 후 작품의 생생한 인상과 다양한 의견을 나누고자 모였습니다. 윤지현, 김연정님과 함께 조금 전 관람한 국립현대무용단의 <이미아직>(안무 안애순) 공연에 대한 비평을 해보겠습니다. <이미아직>은 지난해 5월15일부터 18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대극장에서 처음 관객들에게 선보인 바 있습니다. 이번에는 재공연으로 토월극장으로 장소를 옮겨 4월 26일까지 공연되었습니다. 초연 때보다 다듬어진 부분도 있고,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보신 작품의 전체적인 인상을 나눴으면 합니다.

 



윤지현
: 공연소개 기사를 통해 <이미아직>은 죽음 이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다룬다는 것을 알고 공연을 봤습니다. 죽음 이후에 대한 전통적인 가치관과 태도를 현대무용은 우리의 동시대적 삶과 어떻게 연결하는지를 보고 싶었습니다. 과거의 죽음은 인간의 힘으로 막지 못하는 불가항력적인 것이었고, 설혹 안타깝고 원통할 수는 있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대의 많은 죽음은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것이기도 해서 자연의 한 과정으로 이해하거나 화해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과거 진혼굿은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다독이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죽음을 그렇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듯 죽음을 내쫓으며 공격하는 것으로 해석되던 장면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무대 위에 펼쳐지던 여러 모습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일로 묘사되는데 죽음 이후가, 완전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그토록 힘겹고 살아있음과 다름없는 것인지 새삼 놀랍고, 두려움을 갖게 했습니다.

김연정: 국립현대무용단의 동시대성과 전통에 천착하는 그간의 행보도 있고 <이미아직>이라는 제목에서부터 오는 사고의 신선함이 공연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했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 공동체적 제의를 통해 다시 삶으로 돌아오는 모습들을 강렬한 한 시간 반의 공연으로 풀어냈다고 할 수 있는데 저에게는 오히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삶의 군상들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아직 살아있으나 이미 살아있지 못한 나약하고, 휩쓸리고, 비루하고, 미디어에 파묻힌 삶이 실제 죽음이 아닌가라는 메시지로 읽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읽었다고 하는 편이 맞겠지요. 우리가 과연 주체적 삶을 살고 있는지, 살아 있지만 죽어 있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닌지를 되묻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보는 현대무용 공연이었는데 끊임없이 변화하고 형식적인 틀에서 자유롭게 진화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김혜라: 오늘 공연은 전체적으로 무용수들이 작품을 제대로 소화해 내지 못했습니다. 몸이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일까요. 죽음에 대한 의식을 조명하겠다는 취지인데요. 무의식의 지점을 춤추려면 온전히 의식을 놓아야 하는데.... 작품이 의도한 삶과 죽음의 경계라는 지점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 것 같아요. 특히, 죽음의 고비일 수도 있고, 억울한 죽음을 풀어내는 장면이기도 한 20여분의 남성 군무가 이 작품에서는 극한의 몸성을 보여주는 하이라이트라고 생각되는데요. 오늘 공연에서는 격렬한 몸의 가능성을 조명하지 못하여 전체적으로 동력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죽음에 이르게 된 다양한 에피소드와 이미지들이 개연성 없이 숨차게 나열되었고, 춤꾼들 서로간 주고받는 춤과 관객에게 보이는 시점이 너무 복잡하게 교차되어 개념전달이 모호했습니다.
다음으로 <이미아직>작품에 협업한 분야에 대한 의견을 나눠보지요. 초연에 비하여 주재환의 무대미술(병풍씬)이 축소되었고, 초연했던 아르코대극장에 비하여 토월극장의 넓이와 깊이감이 달라 몽환적인 작품 이미지가 덜 조명되었습니다. 무대 오브제나 연출 부분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윤지현: 주재환의 도깨비 오브제는 죽음을 두렵고 무거운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가볍게 받아들이도록 돕습니다. 이는 죽음을 자연과 삶의 한 과정이라고 보는 전통적인 관점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상에서 보여주던 물속을 떠도는 죽음의 이미지는 최근 우리 사회가 목격한 끔찍한 사건을 떠올리게 하면서 죽음을 해학적이고 가벼이 넘기게 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에다 온전한 사람의 형상이기 보다는 이상한 생명체의 형상을 한 넋전은 도깨비처럼 귀엽고 우스꽝스럽게도 보이지만 동시에 왜곡된 죽음처럼 괴기스럽기도 합니다. 죽음에 대한 다른 관점이 이를 다르게 보이게 한다는 생각입니다.

김연정: 넋전과 도깨비가 혼합되어 물속에서 부유하는 듯한 이미지가 영상을 통해 무대 전체를 감싸도록 연출한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치 나 또한 떠나지 못하고 부유하고 있는 그들과 함께 물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 같은 생각에 순간 섬뜩하기도 하면서 예술 작품이 줄 수 있는 아픔에 대한 공감능력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김혜라
: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 얘기해 주시지요.

윤지현: 제게는 두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 거품을 토하는 남자의 등장장면과 큰 소리를 지르며 무대의 한쪽 끝에서 다른 끝으로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무섭게 내달리던 군무 장면입니다. 삶과 죽음에 대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 하지만 무의미한 거품만 토해내는 사람은 알아주는 이 없는 억울함처럼 답답하고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반면 소리 지르며 내달리던 군무진은 그런 억울함을 분노로 표출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쨌건 두 장면 모두 ‘이미’ 도래한 죽음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억울한 죽음을 수용하는 결말보다는 갑자기 뛰어드는 군무와 분노에 찬 듯한 외침에서 공감과 위안을 받았습니다.

김연정: 인상적인 장면은 여러 춤꾼들이 옷을 올려 등을 보이고 일방적으로 맞는 모습과 그들을 매몰차게 때린 사람과 맞은 사람들이 서로 껴안고 위로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맞기 위해 스스로 맨몸을 드러내고 기다리는 것도, 당당하고 주저함 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피해자로서나 가해자로서 모두 인식하지 못하고 길들어져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죽음으로 언제든 내몰릴 수 있는 폭력사회에 무방비로 노출된 삶이며, 결국 양자 모두가 위로와 진심어린 이해가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사회 전반적으로도 위로가 필요한 시대임을 생각해 봅니다.




김혜라
: 아직도 우리사회는 작년 세월호 이후 죽음을 바라보는 공동체의 시선이 ‘이미아직’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마지막 장면에서 죽은 넋전들을 떠나 보내주는 장면이 오늘의 죽음을 대하는 사회적인 정서와 잘 맞지 않아 공감하기 어려웠습니다. 작품에서 아쉽게 느껴진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죠.

윤지현: 요즘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도, 화해할 수 없는 동시대 죽음의 이유들을 목도하게 됩니다. 이를 생각한다면, <이미아직>은 과거 전통사회에서처럼 죽음을 삶과 자연의 한 과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럴 수 없음을 역설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대 위 무용수들의 몸짓이 보여주던 치열한 각축은 이미 죽었다면서 다시 살고 있는, 그래서 죽음 이후도 그리 편안해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결말은 죽음과의 화해와 수용이었습니다. 후반부 길게 이어지던 남성군무가 갈등을 풀어내는 푸닥거리를 시도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죽음의 흔쾌한 수용은 왠지 서둘러 맺는 결말 같았습니다.
이 결말은 제게는 동시대 죽음에 대한, 특히 지난 1년 전 국민을 상중의 슬픔과 아픔에 빠뜨린 세월호 참사 이후의 사회적 정서와 거리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아직 할 말도, 아직 풀어야 할 분노와 억울함이 있거든요. ‘이미’ 죽었는데 ‘아직’ 할 말이, 풀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어요.

김연정: 저는 이 작품이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위태위태한 삶의 모습들을 서사적 구조가 아닌 상징적 안무와 이미지로 위트 있고 현명하게 표현했다고 봤습니다. 예를 들면 끊임없이 뒤집혀지는 사람, 개를 부르는 사람을 통해 모두 개로 변해가는 모습들, 목적과 의미 없이 찰나적으로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군중들, 거품으로 토해지는 속 시원히 다하지 못 말, 미디어의 권력에 스러지는 개인, 그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가도록 강요받는 구조화된 사회, 이 모든 것들을 뒤로 하고 경계의 문턱을 넘어가는 죽음의 기운, 그리고 삶.
그 장면 장면이 상징하고 의미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유추해나가며 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잘 훈련된 무용수들의 몸이 그 재미를 배가시켜 주었고요. 하나 아쉬웠다면 오히려 공연 안내물에 적시된 문자화된 추상적인 내용들이 공연을 주체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체적 안무와 설명된 글들이 서로 잘 맞아 떨어지지 않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오히려 글의 틀에서 볼 때 공연에 대한 가독성이 떨어지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김혜라: 동감입니다. 오늘 저희들이 나눈 여러 인상들이 사뭇 실제 팜플렛에 담긴 공연의도와는 다르게 해석되는 부분도 많았습니다. 사실 작품을 두 번 본 저로서는 작품에서 우리사회 현실적인 죽음에 대한 애도와 분노로 구체성을 두고 안무를 고려했다는 생각은 별로 안 들었습니다. 안애순 예술감독의 안무 스타일의 연장선에 있는 상징적인 작업이죠. 사실 국립현대무용단 감독을 맡기 전의 안감독의 발랄한 유희성과 전통에 대한 고민이 예전보다 깊어졌다 할 수 없습니다. 작품의 출발점이 추상적인 경계지점을 짚고 가기에 끝없는 상상력을 관객에게 요하고 있으며 초연작보다 의미 잡기가 더 어려워지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춤과 음악의 관계 그리고 움직임 언어에 대한 집중적인 결속력이 작품의 개념을 명확하게 전달 할 수 있어 보입니다.
이야기의 초점을 옮겨보죠. <이미아직>은 프랑스 샤이오 국립극장에서 한국의 국립단체로서 대표성을 띠며 교류할 작품이기도 합니다. 물론 표면적으론 도깨비 이미지나 노랫소리 그리고 음악연주가 한국적인 정서감을 유발하였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한국적인 집단무의식적 정신세계를 전통의 해석이란 동시대의 춤언어로 온전하게 풀어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김연정
: 현대춤이든 한국춤이든 춤을 추는 사람으로서 이 부분에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봅니다. 일반화시켜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자신들의 독특한 스타일을 구축한 외국의 현대 무용단들의 경우 어느 출신인지 특색이 드러나고 그 나라의 문화적 성격이 명확하게 보이는데요. 오늘 작품이 한국의 대표성을 띤 무용단이라고 해외에 나갔을 때 어떤 점이 한국적인 특색으로 조명될지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후기 식민주의적 논의가 부재한 공허한 자아 찾기가 아닐런지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윤지현: 우리의 생활이 서구적으로 변해온 상황에서 일상의 몸짓과 습관을 한국적이고 고유한 것으로 지키거나 찾아내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공연에 참여한 젊은 무용수들의 훈련과 창작과정에서도 전통적 몸짓을 경험하고 받아들일 여지는 많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전통적인 춤언어를 지키고 찾아내기도 어렵다고 봅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라는 죽음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을 주제로 다루고, 넋전과 도깨비 이미지 등 전통에서 무대장치와 소품을 가져오고, 전통악기와 소리로 구성된 음악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이 모두는 전통과 과거에 대한 오늘의 해석입니다. 무대 위에 오르는 몸과 몸짓 역시도 안무자와 무용수가 새로이 해석한 전통이라 생각됩니다. 전통의 해석이라는 점에 이미 전통적 춤언어의 고유성이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실상 다른 국가의 현대무용단의 작품과 두드러지는 차이나 특색을 찾기는 힘듭니다. 다른 나라의 무용단과는 확연히 다른, 한국 전통문화의 고유성이 드러나는 춤언어를 작품에서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일상의 문화가 동질화 되는 세계화 상황에서 국립단체가 추구하고 지켜내야 할 전통적 춤언어의 고유성이 어떤 것인지, 과연 있기는 한 것인지 실은 의문스럽습니다. 이는 외국무용단과 우리나라의 국립현대무용단의 작품 사이에서도 그렇고, 한국의 국립무용단과 국립현대무용단의 작품 사이에서도 고심하게 되는 문제 지점으로 보입니다.




김연정
: 지난주 국립무용단의 <제의>와 오늘 국립현대무용단의 <이미아직>이 죽음에 대한 제의적 성격, 살풀이성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상당부분 재미있는 공통점도 있고 다른 형식으로 풀어냈다는 점을 비교해 볼 수도 있겠는데요. 점차로 우리 사회에서 한국창작춤과 현대춤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고정된 틀에서 벗어난 활발한 몸성이라고 저 나름대로는 보았지만 무엇이 이 둘 각각의 정체성을 말해 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모호합니다. 이것은 우리만이 가진 독특한 고민이기도 하면서 끝까지 안고 가야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김혜라: 특히 최근의 두 국립단체의 작품인 <제의>와 <이미아직>이 특히 교차지점이 많아 독자적 정체성이 모호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두 작업 모두 죽음의 의식에 초점을 두고 한국적인 현대성, 현대적인 한국성을 표방하였기 때문이죠. 안무자의 창작적 자율성은 인정되지만, ‘국립현대무용단’ 그리고 ‘국립무용단’으로서 대표성을 띠는 동시대 한국 춤언어와 색채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한 때 입니다. 사실 이러한 얘기는 새삼스러운 말도 아니고 오랜 기간 안무가들이 고민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실천적인 춤으로 표출되기 까지가 문제지요.
다시 공연으로 돌아와서, <이미아직>이 전체적으로 개념 전달에서는 모호했지만, 개별 장면들은 사회와 개인을 반추하는 의미 있는 접근이었기에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인 거울을 관객 쪽으로 비추며 관객들에게 “우리들은 과연 잘 살고 있는지?” 묻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윤지현
: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죽음과의 경계선상에 있음을 보여주는 장치였어요. ‘이미아직’이란 이미 도래한 죽음과 아직 맺지 않은 삶이라는 삶과 죽음의 전통적 경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왠지 동시대 우리네 삶 자체가 ‘살아있으되 살아있지 못한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대형재난과 전쟁, 넘쳐나는 풍요와 비참한 기아의 공존, 기술발전과 산업화의 그늘인 환경재앙 등 인간의 탐욕이 각종 위기와 갈등을 초래했습니다. 그 와중에 개인의 생명은 갈수록 하찮아지고, 죽음은 너나 구분 없이, 언제 어디에나 우리 가까이 있다고 느끼잖아요? 객석을 서치라이트처럼 비추던 거울의 반사광은 “지금까지 본 것이 바로 네 모습이야. 그런데 아직도 너는 네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니?”라며 섬뜩한 질문을 던지는 듯 했습니다. 마지막 객석을 비춘 거울의 반사광은 전통과 과거를 이야기하던 무대를 오늘 우리의 이야기로 확장하게 하는 효과적인 장치였습니다.

김연정: 네, 동감입니다. 삶과 죽음의 문턱의 한 고비를 넘어서서 다시 일상의 삶으로 돌아가는 시점에서 “안녕들하십니까?” 묻는 것 같기도 하고 “살아있으되 정녕 살아 있는가?”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예술 작품이 동시대적 삶의 고민과 성찰을 이야기하고 생각하고 질문할 수 있는 여운을 남길 수만 있어도 반은 성공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김혜라: 지난번 비평 방담에 이어 <이미아직>에 대한 인상과 함께 작품에 직면한 현실적인 문제를 짚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안무가의 의도가 어떠하든 오늘 우리가 보고 해석하며 느끼는 것이 더 생생한 살아있는 작품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관객의 자유로운 몫이기도 하구요. 진솔한 의견 감사드립니다.

2015. 05.
사진제공_국립현대무용단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