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정신혜무용단 〈Turn Toward Busan〉
잊혀진 이들을 위한 위무
권옥희_춤비평가
 잊고 있었다. 그들의 죽음을.
 매년 한국시간 11월 11일 오전 11시. 전 세계에서 부산 유엔묘지를 향하여 1분간 묵념을 올리는 행사 〈Turn toward Busan〉. 자유와 평화를 위해 희생한 참전용사들을 기리기 위한 이 행사는 하루 전인 11월 10일, UN기념공원에 안장된 유엔군 2천 3백위 전사자의 이름을 모두 부르는 ‘Roll-call'부터 시작된다고.
 안무자 정신혜(신라대)의 〈Turn toward Busan〉(11월 9-11일, 영화의전당) 또한 이들의 이름을 무대로 불러내면서 시작된다. 앨런 제임스 러셀, 알트하우스 헨리, 아나카 조지….
 부산을 대표할 수 있는 작품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은 지원금을 받아 든 안무자. ‘꽃피는 동백섬’도 ‘오륙도’도 아닌 2,300명의 죽음이 누워있는 UN묘지를 향한(toward) 애도의 시간을 선택, 고통을 받아든 것이다.
 이 고통의 역사를 받아들고 역사 밖으로 나가보느냐, 혹은 비스듬히 건너뛰거나 아예 외면하느냐, 아니면 시간을 따라 걸으며 자세하게 베껴 쓰느냐. 안무자의 철학이 개입되는 지점이다.


 

 

 전쟁의 역사는 그냥 읽기만 할지 아니면 베껴 쓰는지에 따라 그 위력은 다르게 나타난다. 안무자는 전쟁의 시간을 베껴 쓰는 방식으로 춤을 배치. 전선에서 지휘관이 군인들을 불러내듯, 자아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따라 가지 않고 역사, 전쟁, 죽음의 풍경들이 안무자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따라 가며 춤을 풀어낸다.
 파도가 밀려들어오고 나가는 무대 바닥. 어둠 속에서 전사자의 이름들이 소리로 활자로 떠올랐다가 흩어지고 지팡이를 짚고 선 노병과 소녀. 자신의 발등위에 소녀의 발을 얹고 추는 춤, 그것도 잠시 이내 무릎을 꺾고 주저앉는다. 젊은 날 전쟁과 죽음을 목도했던 기억과 고통이 이렇듯 끈질기게 남아, 죽는 날까지 그 기억은 젊고(늙은 지금) 또 괴로운 것이다. 그의 기억을 따라가는 춤.
 힘을 겨루듯 마주 보고 서 있는 두 명의 남자무용수(형제이기도). 서로에게서 비롯된 감정의 선이 에너지로 확장된다. 그 파장은 가운데서 부딪고 원을 만들더니 이들을 가둔다. 전쟁이 시작된 것. 전투기의 모니터가 뜨고, 총알이 날고 폭탄이 터진다.


 

 

 중간막이 올라간 뒤 이어지는 사선(死線)의 장. 비행기의 잔해로 보이는 설치물, 군인으로 분한 무용수들이 설치물을 이동시키고, 뛰고, 구르고, 달리며 온몸을 무대에 던지나 춤이 영상에 갇혔다. 현란한 영상에 비해 13여명의 군무, 사선(死線)을 넘기에는 역부족인 숫자(춤).
 춤으로 확보해낸 선명한 죽음의 이미지. 철모를 쓴 전쟁의 한 가운데 서 있는 군인과 그림자처럼 그의 뒤에 선 남자. 두 남자는 같은 존재이자 다른 존재이기도. 붉고 검은색의 긴 소매와 폭넓은 바지 의상을 입은 남자의 솔로. 팔을 들어 뿌리니 검은 빛. 빛을 뿌리는 것이 아니라 흡수한다. 모든 삶이 죽음을 흡수하여 그렇게 성장하듯이, 또는 모든 죽음이 삶을 끌어안고 그렇게 만발하듯이. 전쟁, 이 죽음 속의 삶, 또는 살아있는 죽음들은 어쩌면 훨씬 더 활달하게 피어날 수 있었을 지도. 영상 없이 춤으로만 배치한 삶과 죽음의 경계(境界), 인상적인 장이었다.
 자기 안의 타자의 죽음은 자신의 죽음이다. 무대가 얼어붙고. 빛은 잠시, 이내 금이 가면서 가라앉는 어둠. 어둠의 늪에서 벗어나려는 병사가 벽을 기어오르고, 또 다른 남자(자아)는 부서져 내리는 (어둠)얼음과 함께 무대 아래로 가라앉는 그림(영상디자인 김장연), 근사했다.


 

 

 놋다리밟기, 끊임없이 소녀에게 등을 내주는 군인들, 소녀가 밟으며 가는 미래는 그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말하는 듯. 민속춤을 변용, 의미와 형식을 모두 확보해낸다. 부산의 피난시절을 보여주는 흑백 필름.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굳세어라 금순아’. 가요인 듯 아닌 듯 편곡된 감각적인 음악, 적절했다. 정신혜는 여기저기에 맑고 평화로운 웅덩이 같은 것을 파놓고 거기 들어가, 우리가 보지 못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위무의 장. 빠르게 상징물을 만들어내는 영상, 흰색의상의 여자무용수의 솔로. 춤을 추기도 전에 몸을 너무 빨리 실어 나르는 발, 그 발을 따라다니지 못한 관객들의 상상력이 춤을 떠난다. 좋은 춤은 상상을 하게 만들고 그 상상력이 무용수가 입은 의상을 베일처럼 펼쳐 덮기도, 베일 아래서 아무도 모르게 그들을 위무하기도 한다. 그것이 춤으로 보여주는 변화와 교환이다. 그렇게 춤으로 보여주는 세계에서 죽은 이들의 이름들이 풀려나오고, 길을 따라가고 있는 관객에게 그 이름(죽음)들을 인식시켜야 한다. 아쉬운 장이었다.
 소녀에게 등을 내준 다음 느닷없이 달리는 무용수에서 툭 끊어지는 이야기. 장과 장 사이의 연결 지점이 선명하게 잘 드러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명분 없는 전쟁, 그 전쟁에서 스러져간 이들의 역사에 대한 합리적 설명이란 것이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는지도. 이타적 몸의 죽음은 같은 자아로서의 의식의 죽음이다. 인간은 그 역사 속에서, 전체가 되어야하나 사망으로만 전체가 되는 이상한 싸움에 그렇게 말려들어왔다.
 어쨌든 지나간 일들 가운데 무엇인가가 오늘의 세계 가장자리에 분명히 보존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예술이라는 춤 작품 속에 넣어 성스러움의 감각들에 주파수를 맞춰봄으로써 이 세속의 시대에도 여전히 남아있을 희생과, 평화, 자유라는 가치에 대해 말하고 소생시킬 수 있는(을) 것이다.


 

 

 소녀와 어린이 합창단들의 노래, 천장에서 크고 작은 볼이 가득 무대 위로 쏟아진다. 무용수들이 객석으로 내려와 유가족들에게 경례로 경의를 표하고, 꽃을 건넨다. 일어나서 박수로 답례를 하는 유족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안무자가 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었지만, 잊고 있었던 것을 안무자는 본 것이다. 무심하게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UN묘지는 거기 있을 것 같지 않은 것이지만 정신혜는 그것을 보고 춤으로 만들었다. 춤으로 만들어낸 그 시선은 본질만을 따지면 예술적인 것이지만, 나름의 윤리적인 의미 또한 지니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전공했다. 자유로운 춤, 거짓말 같은 참말로 춤이 춤으로 진실(춤적 진실)을 말하는 춤을 좋아한다. 스스로 자유로워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춤을 만드는 춤작가와 무용수들을 존경한다. 대구, 부산 공연을 많이 보고 있다.
2017. 11.
사진제공_정신혜무용단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