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연재 | 나의 현장 상상 3
무용수를 구합니다: 제 작품에 출연해 주시겠습니까
김현진_안무가

보통 ‘춤’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모습은 춤을 추는 사람, 무용수의 이미지일 것이다. 춤의 요소에도 ‘무용수’가 포함되듯이, 어떤 장르의 춤이든 춤은 춤을 추는 사람을 통해 이루어진다. 춤이 안무로 전환·확장되어도, 우리는 기본적으로 춤이란 사람의 몸을 통해 어떤 것을 표현하는 예술로 여긴다. 단, 예외도 있다. 윌리엄 포사이드(1947~)는 〈흩어진 군중〉(Scattered Crowd)(2002~2013)에서 무용수 대신 풍선을 택했다. 설치미술에 더 가까워 보이는 그의 작품에서, 그는 헬륨 가스를 채운 하얀 풍선 6000개를 실내 공간 곳곳에 띄워놓고 관객과 유기적인 관계에서 탄생하는 움직임의 변화를 ‘안무’라 했다. 그의 작품에서 풍선과 관객이 퍼포머가 되었다. 그밖에도 닭, 개, 돼지 등 동물이, 메타버스에선 아바타가, 그리고 A.I.와 결합한 가상 이미지와 기계가 무용수로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예시는 아직까진 예외일 뿐, 대부분의 안무에는 실제 인간 무용수의 움직임이 춤 작품의 주요한 표현 수단이 된다. 그러므로 춤 작업에 있어 어떤 무용수가 출연하는가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는 춤을 보는 관객의 입장이나 춤을 만들어내는 안무가의 입장 모두에게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도 둘 중 이 문제에 더 절박한 쪽을 택하자면 그건 안무가일 것이다.

그런데 좁은 춤 시장에서 안무자의 입맛에 맞고 시간적 여유도 있는 무용수를 구하기란 쉽지가 않다. 예술로 길게 생존하기 힘들어서인지 아니면 대부분 무용단에 속해 있는 몸이라 외부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탓인지 그도 아니면 안무가로의 등장이 빨라진 환경 탓인지 아무튼 점점 더 전문 무용수를 만나기 어려워지는 현실이다. 작지만 강한 나라 대한민국의 무용계는 하루가 다르게 다양한 무용 기획을 쏟아내고 있다. 거기다 정부와 지자체 별로도 많은 공연창작지원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그 덕에 다양한 예술 씬이 생성되고, 젊은 창작자들에게 활동기회가 열리고, 다양한 층위의 창작자들이 예술계로 유입되는 등 긍정적인 변화가 일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어떤 일에도 명과 암이 있다. 이러한 고무적인 변화들 속에서도 사각지대는 있는 법이다. 특히 독립무용가들에게 있어서 말이다.

무용 전공 후 학교에 적을 두고 있지 않거나 무용단에 속하지 않은, 소위 ‘독립무용가’들에겐 매번 창작 프로젝트마다 무용수 섭외가 큰 난제이다. 이는 대부분의 독립무용가에게 해당하는 문제일 듯싶다. 오죽하면 주변 독립무용가들이 “이럴 줄 알았으면 학교에 어떻게든 오래 적을 두고 버틸 걸”이라 하소연하겠는가. 무용수 섭외의 어려움은 작은 무대 큰 가지리 않는다. 그나마 예술가들끼리 예술적 교류 차원에서 벌이는 작은 실험 무대는 형편이 좀 나은 편이다. 서로의 사정을 뻔히 알기 때문에 예술가들끼리 발품 팔고 서로 품앗이하며 작업을 그럭저럭 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김현진 〈Nothing there〉(2004) ©김현진




그러나 독립 안무가들이 기획공연이나 공모사업 등에 자신의 작품을 선보일 기회를 얻는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어떻게든 그 기획이 요구하는 여러 제반 요소, 즉 시간, 규모, 사업의 성격 등에 맞는 무용수도 확보해야 한다. 보통 우리나라의 기획공연이나 공모사업이 설계한 제작 기간은 길게는 6개월에서 짧게는 3개월, 어떤 때에는 2개월 남짓이다. 작품 제작 기간이 짧은 이유는, 대다수 사업이 1년 단위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는 정부 산하 공모사업이나 협회 주최의 춤제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이러한 공연들은 한 시즌에 몰려있는 경우가 많다. 무용계 대다수가 시즌별로 한꺼번에 작품을 만들고 한꺼번에 작품을 올리게 되는 셈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독립 안무가들은 어떻게 생존해야 할까. 너도나도 우선 무용수를 확보해야 판에서, 몸 하나로 버티는 독립 안무가들에게 와줄 무용수들이 남아 있을까? 기적처럼 잡은 창작의 기회지만 독립 안무가는 그 순간부터 초비상에 걸린다. 가뜩이나 무용수로 활동하는 인구가 줄어든 데다, 비슷한 시기에 많은 무용 기획 프로그램들이 진행되다 보니, 학교든 무용 단체든 기존의 시스템에 속한 무용수는 다른 작품에 참여할 여유도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안무자와 무용수 간 구인 구직을 연결해주는 인터넷 사이트도 애플리케이션도 없다. 독립 안무가들은 늘 해오던 대로 주변 인맥에 기대어 한 명의 무용수라도 소개를 받거나 지인 무용수에게 일일이 전화를 돌려 출연 의사를 타진해볼 뿐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무용수가 섭외된다면 그건 정말 천운이다. 작품에 참여해준 귀한 무용수가 작품 컨셉에 맞는지, 안무자와 소통이 잘 되는지 따져 볼 여유도 없다. 여기까지 와준 무용수가 고마울 뿐 그다음 문제는 안무가의 몫이 된다.




김현진 〈기괴한 도시〉(2014) ©김현진/이재훈




매번 주어진 것 안에서 어떻게든 요리해내야만 하는 숙명에 처하게 되는 독립 안무가들의 무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못 되는 현실에서 수준 높은 작품 혹은 안무가가 원하는 그림이 나오기란 좀처럼 쉽지 않아 보인다. 거기까지 왔으면 그래도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 편이다. 안심하기엔 아직 이르다, 더 남았다.

만약 작품에 섭외된 무용수가 무용계에서 인지도가 있다면, 그 무용수는 여러 작품에 동시에 캐스팅될 가능성이 크다. 프로 무용수들에게 출연료가 주요한 수입원이고 또 출연 자체가 공부이자 여러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에 무용수들은 기꺼이 겹치기 출연이라는 열매를 베어 물게 되는 것이다. 그걸 안무자가 막을 길은 없다. 단지 그런 상황이 아쉬울 뿐, 불편하더라도 조율해서 운용해가야 한다. 이럴 때 가장 곤란한 점은 겹치기 출연자로 인한 스캐줄 조정이다. 서로 상도덕을 지키기 위해, 겹치기 출연자가 참여한 상대 공연 연습 스캐줄을 피해 연습시간을 조절하더라도, 혹여라도 상대방 쪽 연습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지면 어쩔 수 없이 겹치기 출연자가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만약 겹치기 출연자가 참여하는 작품의 안무자가 무용계의 어른이라면 차마 무용수 개인이 자신의 사정을 알리고 연습 도중에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뒷순위로 밀리고 밀려 늦은 밤 겨우 확보된 독립 안무가의 연습시간은 작품의 수준을 저하하는 요인이 된다. 무용계의 현실이 그러하니 대다수가 그런대로 이해하고 넘어가며 작업해 왔다 해도, 연습 전부터 기다림에 지쳐 몸과 마음이 지치는 건 어쩔 수 없다. 늦은 밤이 돼서야 이미 온몸의 기운을 다 소진한 채 들어선 무용수에게 안무가가 무엇을 더 주문할 수 있을까. 안무가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몸 상태를 살피며 자정을 넘기지 않도록 최대한 속성으로 안무를 한다. 그도 그런 상황이 미안한지 숨돌릴 틈도 없이 자신을 갈아 넣어 연습에 돌입한다. ‘숨돌릴 틈 없이’ 모두가 자신을 갈아 넣어야만 하는 열악한 창작 환경에서, 작업 과정의 촘촘한 실험과 발견 그리고 실패와 수정 등은 생략된다. 거기에 남는 것은 관성이다. 그저 그런, 재미없는, 어디선가 본듯한 몸에 익숙한 동작들과 클리셰 장면들로 버무려진 ‘신작’이 된다.

어느 계파에 속하지 않더라도 독립 안무가들도 큰 무대에 서서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문턱이 너무 높다. 어떤 무용제는 출연 무용수의 수를 무조건 10명 이상으로 요구한다. 이런 마당에 자신의 몸 하나로 버티는 독립 안무가들이 어디서 그 많은 수의 무용수를 모집하며, 어떻게 그들의 시간을 단 몇 달간이라도 확보할 수 있겠으며, 무슨 수로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이는 마치 어린 애는 저리 가라 하며 팔꿈치로 밀어내는 격이다. 독립 안무가들에게는 그러한 사업에 뛰어들 재간이 없다. 무용 작품의 규모를 떠나 예술가의 예술성과 독창성을 볼 것인지, 규모와 스펙터클을 따질 것인지 무용계가 더 고민해 봐야 할 문제인 듯싶다.

오래 전, 댄스 필름에 접근하기 위해 단기 영화제작 프로그램을 수강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영화제작을 기획하고, 관련 기술을 배우고, 우리가 제작한 영화에 출연할 배우들을 선발하기 위해 오디션을 본 적이 있다. 아마추어들이 제작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사이트에 올린 배우 모집 공고를 보고 그 많은 수의 배우 지망생과 기성 배우들이 순식간에 몰려왔다는 사실에 많이 놀랐었다. 단 몇 분밖에 주어지지 않은 오디션에서 자신에게 할당된 대사를 읊으며 그간의 노하우가 담긴 혼신의 연기를 펼치는 그들의 모습에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눈빛이 아직도 나의 눈에 선하다. 바라건대, 우리 무용계에도 그렇게 살아있는 무용 시장이 형성되어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으면 한다.

김현진

'김현진의 춤공방' 대표. 예고와 학부 그리고 대학원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하고, 영국에서 '무용문화와 실기과정' 석사를 마쳤다. 컨템퍼러리무용단 ‘탐’에서의 무용수 활동 이후, 독립 안무가로 지내며 〈나의 이야기〉(2022), 〈몸으로 자연으로〉(2016), 〈몸의 부호들〉(2015), 〈기괴한 도시〉(2014), 〈Nothing There〉(2004), 〈Discothéque〉(2003), 〈벗겨진...〉(2001) 등을 발표했다. 월간 「춤」, 「댄스포럼」에 춤기행문과 춤에세이를 연재기고한 바 있다. ​​

2022. 7.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