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2018 한국춤비평가협회 정기포럼
오늘의 춤 창작 경향과 비평

■ 발제 1

서유럽 춤 축제에서 짚어보는 최근 유럽 컨템포러리 춤 경향

 

김혜라_춤비평가 

 

특정한 경향이 없는 것이 최근 유럽의 컨템포러리 춤의 경향이랄까? 아니면 ‘다양성’ 혹은 ‘다가치성’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경향을 말하자면 유럽 춤계의 큰 축으로는 피나바우쉬의 춤에 연극적 기법을 결합한 탄츠테아터(Tanz theater)의 유산과 네덜란드 테아터의 발레에 현대춤 어휘를 절충적으로 결합했던 현대발레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이 기초에서 변형 혹은 진화하여 다양한 장르로 발전해 다원예술 작업들로 이어지고 있다. 주제 측면에서는 인류애에 기초한 문명·사회 비판적인 작업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최근에는 유럽의 정치적 이슈이자 생존권의 문제인 테러, 폭력, 난민과 관련된 작업들이 다양한 형식으로 창작된다. 

  유럽 현대춤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보면 우선 루돌프 본 라반과 마리 비그만으로 출발한 표현주의에서 독자적으로 창안한 독일의 피나바우쉬와 현대춤의 테크닉과 주제의식을 담은 현대발레 그리고 춤형식의 스펙트럼을 확장(다매체와 융합)한 프랑스의 누벨당스(Nouvelle Danse)로 이어졌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진보적인 실험을 선도한 벨기에의 현대춤을 위시로 춤영역의 표현과 접근은 무궁무진하다.
  앞서 언급한 다양성과 다가치성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우선 최근 경향에서 유럽의 극장과 공간에서는 춤보다는 담론이 선도하는 개념무용이 여전하며, 이런 연장선상에서 새로운 개념을 발견하려는 시도 중 하나로 각종 매체와 장르 간 융합이 활발하다. 아울러 공간의 문화·역사적 특질과 결합한 장소 특정적 방식 및 과정과 참여에 의미를 두는 퍼포먼스와 커뮤니티적 접근은 유지되고 있다. 이와 함께 고전과 민족적 소재의 글로컬(Glocal)한 안무 또한 지속되고 있으며, 기술적 측면에서 시각적 이미지와 상징성을 구현하는데 연출(드라마트루그)과 무대장치의 역할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이외에도 춤역사에 족적을 남긴 안무가들의 작품을 재현하고 기록하는 아카이빙도 필름과 전시를 통해 실현되고 있으며, 일련의 안무 접근법 외에도 아직은 규정할 수 없는 논리와 접점을 찾고자 하는 춤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사실상 각 단체별 성격과 지향점, 극장 규모와 경제적 상황에 따라 모양새를 달리 하고 있다. 그야말로 다양성과 다가치성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춤의 다양성의 배경은 다원적인 가치가 통용되는 개방성과 아방가르드 한 현대춤의 속성을 지지하는 유럽의 분위기가 그 동력이라 생각한다. 유럽에서는 춤이 문화예술의 선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관객들은 문화예술의 최신 트렌드이자 당대성을 읽어 낼 기호로써 컨템포러리 춤을 생각하고 보러온다. 따라서 안무가는 관객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때로는 춤보다 더 긴 토론시간을 할애하여 작품의 맥락과 의미망을 토론한다. 이러한 것들을 집약해 놓은 것이 바로 춤 축제이다. 따라서 발표자는 3년간 유럽에 거주하며 살펴본 춤 공연 중, 주로 축제에서 주목받은 작품들을 분석해 최근 유럽 춤의 경향을 짚어보고자 한다. 물론 축제에서 선택받은 작품들이 유럽춤을 대표한다고 말하긴 어렵다 할지라도 우리나라의 유통구조(단발성 공연)와는 달리 유럽에서는 일단 주목받은 작품들은 적어도 1~2년은 거뜬히 레파토리로 유럽 전역을 돌며 재공연한다. 따라서 충분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유럽의 최신 트랜드 정도는 감지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세부적으로 서유럽의 대표적 춤 축제라 불리는 프랑스의 몽펠리에(Montpellier)와 아비뇽(Avignon) 축제, 비엔나의 임풀스탄츠(Impulstanz), 독일의 탄츠 플랫폼(Tanz Plattform) 그리고 스위스의 스텝스(Steps) 컨템포러리 축제 및 제네바 현지 축제인 앙티젤(Antigel)과 바티(La bâtie) 축제에서 주목 받은 작품들을 통해 유럽의 최신 경향을 살펴보려 한다. 그 트렌드를 읽는 방식은 기존의 작업방식에서 미세하지만 방향성을 달리한 부분에 주목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작품을 둘러싼 여러 요인보다는 공연에서 표현하고 있는 현상에 집중한 분석임을 밝힌다. 세 가지 정도로 최근 주목되는 현상들을 짚어보았다.

 

 


1. 말, 이야기의 비정상적 출현

처음 얘기하고 싶은 경향은 춤 작품에서 언어 사용의 비중이 놀랍게 확대된 점이다. 심지어 이제는 춤 공연에서 언어를 사용하지 않은 작품을 찾기가 쉬울 정도이다. 다시 말해 기존의 작품에서 언어는 부분적이거나 상징적인 기표로서만 사용되었던데 반해, 최근에는 언어의 테크닉은 작품을 선도하거나 맥락을 풀어 작품전체 스토리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예를 들면 연극적 대사로, 서사적·은유적 나레이션으로 그리고 패러디(parody)와 렉쳐(lecture) 퍼포먼스의 형식이 사용되고 있다. (관련 영상:
https://youtu.be/4y7IC140gYI)



Wim Vandekeybus 〈Mockumentary of a Contemporary Saviour〉 ©Danny Willems



  첫 번째 소개할 빔 반데케이부스의 작품 〈현대 구세주의 모큐멘터리〉는 장르로는 공상과학 픽션(SF)으로, 모큐멘터리는 다큐멘터리의 사실성과 허구성을 조합한 새로운 융합장르이다. 이 작품 특징은 연극성·문학성·은유성이 강하고 무대는 공상과학적인 분위기의 설치물과 극적 대사로 가득찬 점이다. 주요 내용은 지구 종말을 배경으로 최후에 구원받은 나라와 언어가 다른 7인이 구원자를 찾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작품을 통해 안무가는 현대인이 섬기는 대상이 무엇이든 맹목적인 믿음과 방황에 빠져있음을 환기시킨다. (관련 영상: https://vimeo.com/164208924)



Eisa Jocson 〈Princess〉 ©Jörg Baumann



  두 번째로 아이사 족슨의 작품 〈Princess〉는 인종 차별과 문화 권력의 위험성을 비판하는 내러티브 형식의 작업이다. 대중 상업문화 저변에 깔린 서구인들의 성적 편견과 차별을 과장된 연기와 동화의 대사를 차용해서 스토리를 구성하고 있다. 특징은 풍자성이 강하고 익살스러운 연기로 주제 전달이 명확하다, 디즈니 회사를 예로 사용하고 있지만 큰 명제는 자본주의 문화와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희생당하는 자국민의 정체성을 폭로하는 것이다. 젊은 안무가인 아이사 족슨(Eisa Jocson)은 필리핀 출신으로 국제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각종 무대에 초청되고 있다. (관련 영상: https://youtu.be/B9ghJIhofCQ)

  마지막으로 보리스 샤르마츠의 작품 〈밤의 춤〉은 도심 밤거리의 소음과 풍광, 댄서들의 절규의 몸짓, 연설하듯 던지는 대사가 작품의 특징을 구성하고 있으며, 댄서들은 공공장소에서 관객들과 함께 정치적인 풍자, 유머, 상징적인 인물들을 빗대가며 정신없이 떠들어 댄다. 대중의 동요와 동참을 구하는 슬로건으로써의 말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풋와 이모빌레떼는 춤의 주요 역사를 강의 방식으로 설명하며 맥락을 짚어준다. 춤과 렉쳐가 결합해 안무가의 의도를 관객들이 쉽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최근 춤에서의 이와 같은 현상은 연극성과 퍼포먼스성이 확대된 기존의 흐름에 문학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결합한 것이며, 특히 시사성이 강조된다. 그 이유는 아마도 포스트모던 한 춤에서 배제된 서사, 일부 좌표 없이 논의되는 담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탈출구 같은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언어를 통한 스토리 구성은 관객에게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일 것이다. 따라서 이전에 말할 수 없는 것을 춤으로 추었다면 이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언어를 통해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2. 그로테스크[1]한 표현의 증가

다른 변화 양상으로 비현실적 공상(空想)의 영역을 그로테스크한 표현으로 조명한 작품들을 얘기하고 싶다. 이를테면 비현실적인 이미지와 무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부자연스러운 것들이 스테이지를 채우고 있다. 이로 인해 일상에서는 볼 수 없는 과장된 신체표현, 괴이한 분장과 표정 그리고 상상을 뛰어넘는 설치물이 오브제로 사용된다. 극대화된 표현성이 전달하는 에너지는 시각적으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고 관객의 상상력을 입체적으로 자극한다. (관련 영상:
https://youtu.be/bLsum2sxUjc)
  그 첫 번째 예로 가브리드라 카리조의 〈어머니〉는 극성이 강한 그로테스크한 연출력이 독특한 작품이다.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비현실을 가로지르며 여러 층위의 의식을 다룬 작품으로 공포감, 침울함, 괴기한 분위기 연출이 낯설고 신선하다. 여기에 엽기적이고 생경한 설치물과 무용단 특유의 비정상적으로 관절을 휘거나 분절시키는 신체표현이 더해져 새로운 시각적 긴장과 자극을 준 작품으로 그 내용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 책임, 고통 그리고 폭력이다. (관련 영상: https://youtu.be/Dp3D2S2H_dU)



Marlene Monteiro Freitas 〈Bacchae-Prelude to a Purge〉 ©Filipe Ferreira



  두 번째로 마를레느 몬테이로 프레이타스의 〈바쿠스-제거의 전주곡〉은 그로테스크와 저속한 표현으로 주제를 희화화한 작품이다. 특징은 코믹하고 익살스러운 표현, 과장된 몸짓, 무질서한 난장으로 고대 제의를 현대적으로 재현한 것이다.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찬양하는 이 작품은 아폴론적 이성(합리)이 디오니소스적 광기(도취)에 전복됨을 은유하며 신화적 사유를 현실감 있게 해석하였다. 작품의 젊은 포루투칼 안무가는 2018년 비엔날레 은사자상을 받으며 유럽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안무가 중 한 명이다.  




Claudia Bosse 〈the last Ideal Paradise〉 ©Peter Goesens/Eszter Salamon



  마지막 예로 클라우디아 보세의 〈the last Ideal Paradise〉 [2]는 판타지한 이미지로, 에스더 살라몬의 〈Monument 0.5:The Valeska Gert Monument〉 [3] 작품은 과장과 기이한 표현들이 가득한 구성이다. 두 작품은 다원 예술로 각 장르마다의 특수성이 움직임과 결합되어 생경한 표현성으로 주목받은 작업이다. 클라우디아 보세는 인간 문명의 폭력과 파괴로 유린당한 영토적 의미를 상기시키고, 에스더 살라몬은 사회 제도들의 이면을 비판하며 억압된 개인의 자유를 환기시키려는 내용이다. 이 두 작품에서도 말은 주제를 각인시키는 주요 요소이다.

  이와 같은 판타지와 그로테스크한 극적 표현들은 피나 바우쉬가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생활(삶) 세계를 조명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달리 표현하면 전통적인 안무가들이 심리적 접근으로 인간내면의 감정을 그로테스크하게 표현하는 방식보다도 공간성의 범위가 확대되고 다채로워진 것이다. 의도가 명확한 서사적 표현, 반복과 차이에서 의미가 생성되는 일상적인 움직임과는 달리 뒤틀리고 왜곡된 그리고 비현실적인 표현과 테크닉의 결합이 공연예술의 다양성을 더욱 확장시키고 있다.

 

 


3. 움직임으로 정서를 표현하는 방식

앞선 흐름과는 달리 마지막으로 살펴보려는 경향성은 여전히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춤다운 것으로, 다른 요소보다 움직임을 위주로 생성해 내는 정서표현에 기반한 작업이라는 측면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춤 본연의 성격인 ‘원시성·서정성·집단적 충동성’에 천착한 작업들에 주목해 보았다. (관련 영상:
https://youtu.be/EB2Zu-hgDP8)



Simon Mayer 〈SunBengsitting〉 ©Florian Rainer



  우선 시몬 마요의 〈SunBengsitting〉는 즉흥적 충동과 유희성을 토대로 원시적 서정성을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놀이성과 패러디의 적절한 조합, 민속춤(Wiener Staatsballett)과 민속음악(Jodel)의 조합 등이 전원적인 풍경을 동경하게 만든다. 특징을 요약하면 투박하지 않으면서 순수하고 자유로우며 평온한 정서를 전달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작품의 젊은 안무가는 2015년 비엔나 임풀스탄츠에서 젊은 인재상 수상 후 임풀스탄츠에서 매 해 신작을 발표하며 주목받고 있다. (관련 영상: https://youtu.be/JUfOdR6bNsE)

  다음으로 샤론 에알과 게 비하의 〈러브 챕터 2〉는 인간의 잠재된 집단적 엑스타시와 충동적인 힘을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반복적인 거친 동작과 박진감 있는 리듬을 통해 요염함, 침울함, 환희와 같은 미묘한 정서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다시 말해 내적 충동이 극대화 된 집단적 외침으로 고양되는 과정을 춤으로만 오롯이 확인할 수 있는 특징을 지닌 작품이다. 2017 프랑스 비평가협회에서 최고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관객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관련 영상: https://youtu.be/At8oWKWlfCw)


 


Boris Charmatz/Musée de la danse 〈10000 Gestures〉 ©Tristram Kenton




  마지막으로 보리스 샤르마츠의 〈10000 Gestures〉에서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에 맞춰 댄서들이 거의 만(10000) 가지의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제스쳐와 행위를 쉴 틈 없이 반복 없이(400동작) 난장으로 펼치는 작품이다. 예를 들면 기쁨, 우울, 분노, 고통, 고독 등 잊을 수 없는 순간인 감정의 조각을 직설적인 행위로 표현하는 것이다. 보리스 샤르마츠는 찰나적 순간에 벌어지는 내적 충동을 다이나믹하게 연주하여 살아있는 몸을 강력하게 각인시켰다. 비평가들은 “삶과 죽음에 대한 묵상”, “Original Mordern”, “새로운 춤이다” 같은 찬사를 남겼다. 

 

  이와 같이 언어표현과 공상과학적 장치 등을 사용한 새로운 시각 경험이나 사실적 극적 표현 경향과 달리 전통적 방식인 몸과 춤만을 통해 정서표현에 집중한 작품들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술적인 춤에 대한 원형을 거부 내지는 극복한 포스트모던 춤은 형식적으로 배제된 장르(비예술)의 흡수와 타 매체와의 융합으로 춤의 개념을 재정립하고 표현범위도 확장하였다. 그러나 아마도 다년간 이어온 장르 간 융합이 이제는 관습화 되어 신선함을 잃어가고 있다. 또한 미니멀한 움직임에서 획득할 수 있는 의미의 불확실함과 난해함, 엽기·파괴·외설을 정면에 내세운 실험성이 짙은 작업에서는 결핍될 수밖에 없는 ‘정서’ 다시 말해 ‘춤의 건조함’을 복원시켜줄 대안으로써 이런 작업이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전위적인 형식과 정신적인 개념에 무게를 두었던 포스트모던 춤의 흐름이 아닌 춤의 본원적인 ‘살아있는 생명력의 오리지널리티’로 다시 재조명 받는 것이다.
  이상으로 최근 작품현상에서 짚어지는 세 가지 경향성은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언어표현을 통한 소통, 허상의 이미지와 이를 상징하는 오브제와 극적 표현성의 확대 그리고 춤의 원형을 복원하여 살아있는 정서로 교감하는 창작활동으로 발전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다음으로 소개하는 방식들은 최근의 동향은 아니지만 여전히 춤 공연에서 강력하게 자리매김한 두 가지 창작경향이다. 먼저 예술적 영감과 창조력으로 관객들의 사유를 자극하고 무수한 메타포로 해석적인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융복합 작품들이다. 시각적 영감을 주는 강력한 이미지와 상징성을 통해 무대를 스펙타클한 환영으로 가득 채운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삶과 죽음이라는 연장선에서 인류를 지탱해 온 거대한 개념[4]을 주제로 다루고 있으며, 예를 들면 아비뇽페스티벌에서 찬사를 받은 드미트리 파파이오아누의 〈The Great Tamer〉, 〈Still Life〉, 임펄스탄츠에서 샤샤 왈츠의 〈kreatur〉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관련 영상: https://youtu.be/iXXPX6wfjwEhttps://youtu.be/rXj6BKvcNGQ)
  다음으로는 고전과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이들 창작방식은 과거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지속될 보편적인 개인·문화·국가간 차별성을 확인시키는 창작법이다. 예를 들어 서구인들의 고전인 신화, 성서, 민속은 마르지 않는 아이디어인 샘이고, 다른 대륙의 전통문화와 민속적 소재는 여전히 이국적이고 독창적인 것으로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아이디어와 소재들은 때로는 정련된 현대적 감성으로 때로는 날 것 그대로 작품에 투영된다. 특히 각 대륙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댄서 그 자체가 문화적 기호로 작용하여 작품의 성격을 규정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시드라비 쉐르카위 작품 〈Fractus V〉와 〈Icon〉 [5]은 다른 문화, 전통, 신화적 소재를 현대적 논의와 결합하여 해석한 작품이다. 한편 제르멘 아코니의 〈Somewhere at the Beginning〉에서는 아프리칸의 주술의식, 민속적 상징물과 리듬을, 마크멧은 작품 〈Beytna〉 [6]에서는 레바논식 요리를 만드는 등 민속적인 요소를 날 것으로 재현하였다. (관련 영상: https://youtu.be/-kpVZ-HXGVw)
  마지막으로 열거한 축제들에서는 춤역사에 영향을 끼친 인물들의 작품을 재현하고 아카이빙하여 예술적 성과를 전시하며 기록하고 있다. 임풀스탄츠에서는 얀 파브르를 몽펠리에서는 NDT의 한스 반마넨과 트리샤 브라운을 조명한 것이 한 사례이다. 우리 춤계에서도 이와 같은 연구와 기록을 적극 수용하여 선배들의 예술적 성취를 보존할 필요가 있다.
  서유럽의 대표적인 춤 축제를 통해 짚어보는 유럽 춤의 경향성은 서두에서 말했듯이 특정한 경향이 없는 것이 경향이라는 말로 가름하고 싶다. 춤 축제를 돌아보면서 창작된 작품이 유럽의 문화적 자긍심과 보존을 향한 노력의 결실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고, 이런 배경과 바탕에서 지속적으로 유통되는 춤 공연이 다시금 재해석되고 때로는 새로운 시도와 만나 융합되며 시대의 흐름을 따라 진화하는 것을 보며 부러웠다. 어떤 것은 오히려 전통기법을 통해 역설적으로 신선함을 전하고 여러 공연을 분석한 발표자에게도 처음 보는 영화적 기법이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장치와 기법에 압도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 유럽은 예술의 뿌리이고 그 자체이다. 모든 유럽의 작품이 이러한 본류라는 자부심과 또 유럽인의 예술에 대한 사랑에 기반한 것임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 전통과 뿌리를 알고 그 토대를 우리나라에 맞게 쌓을 방식을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유럽 현대춤의 최신경향을 알기 위해 고민하기 전에 유럽 현대춤의 이런 토양을 배우는 것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
[1] 그로테스크라는 용어는 괴기, 과장, 왜곡, 아이러니, 풍자를 포함한 기존의 것에 대한 변형으로 통용된다. 
[2] 이 작품은 장소특정성 퍼포먼스로 공연장 안팎을 관객들과 퍼포머들이 다니며 의례에 동참하고 공간적 의미를 경험하게 된다. 이 작품은 오랜 시간 공들인 흔적이 보이는데 인류학적 관점을 유지하면서 춤, 연기, 영상비디오, 대사, 설치, 유물전시, 코러스, 아카이빙, 역사적 건물까지 모든 것을 융합 한 복합물이다. 
[3] 이 작품은 1920년대 독일의 대표적인 표현주의자이자 다다이스트였던 발레스카 거트(Valeska Gert)를 회고하며 그의 급진적인 아방가르드 정신을 다시금 해석해서 환기 하고자 한 작품이다. 퍼포머는 정체성이 불분명한 중성적인 포지션으로 연극적인 대사와 경직되고 과장된 몸짓과 표현이 중심이 된다. 
[4] 자연, 문명, 신화, 역사, 예술, 철학, 과학, 창조, 파괴, 소멸, 육체 …
[5] 국적이 다른 배경의 댄서들과 아시아·아프리카 음악으로, 상징적인(민속, 신화적) 체스쳐와 대중적 춤사위(힙합,브레이크 등)를 적극 결합하여 단체의 개성을 확고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6] 국적이 다른 네 명의 댄서와 요리사와 함께 레바논식 요리를 직접 만들며 춤추고 나눠먹고 담소하는 과정을 담아내는 작품이다.

 

 

─────────────────────────

 

 



■ 발제 2
아시아 현대춤과 국가정체성
- 타이완의 클라우드게이트무용단과 태국의 피쳇클런천의 사례

서정록_ 한예종 무용원 교수


국가 정체성과 춤


최근 아시아 춤의 경향을 살펴보는데에는 복잡하고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 또한 아시아에는 다양한 나라들이 존재하며, 그 나라들 안에서도 다양한 지역이 있으므로 아시아 춤의 최신경향을 한마디로 이야기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 글은 이러한 다양한 관점들 가운데 현재 특히 주목할만하다고 생각되는 경향 중 하나인 국가정체성과 아시아춤을 주제로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아시아국가들 중 타이완의 클라우드게이트무용단(Cloud Gate Dance Theatre, 雲門舞集)과 태국의 피쳇 클런천(Pichet Klunchun)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왜 이들 국가에서 국가정체성을 강조하는 춤들이 등장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국가란 “일정한 영토와 그 영토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고, 주권에 의해 다스려지는 사회집단” [1]이라 정의한다. 그리고 국가 내에서 구성원이 가지는 공동체의식을 국가정체성이라 한다. 국가정체성은 개인의 삶이 그가 속한 국가의 운명과 결부되어 있다는 의식으로, 한 개인이 국가구성원으로서 일체감을 느끼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한 국가의 모든 국민들을 결속시키는 유대감, 국가에 대한 소속감을 지칭한다. 이러한 의식은 국가적 차원의 어려운 문제에 당면했을 때, 구성원 간의 강한 결속을 가능하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 역사적인 이유로, 서구사회에서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의 개념이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것에 비해,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여러 국가들에서는 종종 제국주의에 맞서는 중요한 개념 중 하나로 자리잡으며, 긍정적인 개념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러한 국가주의는 20세기는 물론 21세기가 들어선 현재까지도 아시아에서 그 영향력은 막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국가주의의 영향력은 타이완과 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이들 국가들은 자국의 국내외 사정 때문에 국가의 통합 혹은 국가정체성과 관련된 논의가 매우 활발한 편이다.
  주지하듯이, 국가정체성과 춤의 관계는 근래에 나타난 경향은 아니며 또 아시아에서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관점에서 아시아의 춤을 살펴보려는 것은, 최근 아시아에서 주목받고 있는 타이완의 클라우드게이트무용단과 태국의 안무가인 피쳇 클런천 모두 국가정체성과 관련된 작품들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두 나라의 급변하는 국내외 정치상황들 속에 이 작품들은 각각 나라의 국가정체성과 관련하여 그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춤들의 이해를 통해 아시아국가들의 정치적 사회적 사정 또한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국가통합의 상징으로써 태국의 왕권(王權)

1932년 입헌군주제가 도입된 이후 거의 4년에 한 번 꼴로 군사쿠테타가 발생하여, 우리가 보기에 태국은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한 국가이다. 그럼에도 어떻게 이런 나라가 나름대로 태국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사회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태국의 왕권에 대해 살펴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한 것 같다. 형식적으로 태국은 입헌군주제 헌법을 기초로 하고 있는 나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사실상 절대군주제의 형태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1832년 입헌군주제로 체제가 바뀐 이후 비록 표면적으로 절대왕권을 행사하지는 않게 되었지만 현재도 태국의 국왕은 이상적인 세상의 통치자를 뜻하는 ‘차크라바틴(산스크리트어Chakravatin, 팔리어Cakkavattin)’ 즉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혹은 ‘살아있는 생불(生佛)’이라 불린다. 그리고 이러한 태국의 왕권은 국가통합과 국가정체성의 상징으로써 적극적으로 사용된다. 
  이러한 점은 “탐마라차(Dhammaraja)”와 “테와라차(Devaraja)”라는 개념들의 이해를 통해 알수 있다. 역대 태국국왕들은 탐마라차를 시행하기 위해 즉위 전 혹은 즉위 후 반드시 출가를 하는 관례를 들 수 있다. 여기서 태국국민은 90% 이상이 불교신자들이다. 그러므로 탐마라차는 불교도왕권의 절대성을 지지하는 기반이 된다. 탐마라차는 태국헌법 제7조에 “국왕은 불교도로 종교의 수호자이다.” [2]라고 규정함으로써 단순히 전통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도 실질적인 가치를 지닌 개념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테와라차’ 는 왕의 신성(神聖)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 테라와차는 불교적이라기보다는 힌두적인 개념으로 왕을 비슈누(Vishnu)와 같은 신적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즉 왕은 신이 세속에 나타난 화신으로 절대적인 경외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절대적 통치권을 행사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왕이 쏨뭇띠텝(Sommuttithep) 즉 현인신(現人神)으로, 신과 같은 지위에 있어, 왕은 절대적 통치권을 행사하는 절대 군주의 정당성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것은 태평양전쟁의 패배이후, 일본국민들을 충격에 몰아넣었던 일본의 천황이 1946년 국운진흥조서(国運振興の詔書)를 통해 자신이 아라히토카미(現人神)로서의 신격(神格)을 부정하기 전까지 일본인들의 왕권에 대한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개념들의 적용을 가장 쉽게 살펴볼 수 있는 사례로, 태국의 모든 공공건물과 일반 거리는 물론 거의 모든 일반가정집까지 국왕의 사진이 걸려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테와라자에 의한 신적인 존재인 국왕에 대해 태국에서는 내국인은 말할 것도 없고 외국인이라 하더라도 모욕하는 말은 용납이 될 수 없으며 입에 담는 것 자체가 큰 불경에 해당한다. 테라와차 역시 그냥 관습적인 것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 이를 보장하고 있다. 바로 ‘왕실 모독죄’가 그것인데, 태국 헌법6조는 “왕은 지존의 존재이며 누구도 왕의 지위를 침해할 수 없고, 왕을 비난하거나 고소할 수 없다.” [3]고 규정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왕의 신성(神聖)을 강조하는 “탐마라차”와 “테와라차”를 통해, 태국은 강력한 국민통합을 이루려하고 있다. 그러므로, 잦은 군부의 쿠테타로 야기되는 정치적 불안에 대해, 이러한 왕의 신성에 기댄 국가주의는 어느 정도 사회안정을 가져오는 효과도 있다고 태국인들은 믿고 있다.




콘(Khon)과 태국의 왕권


이러한 탐마라차와 테라와차는 태국의 궁중무용인 콘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난다. 콘의 줄거리는 일종의 태국의 창조신화로도 취급받는 라마끼안(Ramakien)이다. 본래 라마끼안은 인도의 산스크리트로 된 힌두교의 대서사시 중 하나인 라마야나(Rāmāyaṇa)에서 유래한 것으로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진 태국은 이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를 태국왕조의 당위성을 설명하는데 사용한다. 즉 콘은 태국왕조의 정당성과 대의명분을 나타내는 탐마라차와 테라와차를 명확히 드러낸다. 다시말해서 태국의 국왕이 신(神) 혹은 부처의 환생으로 여겨지는 이유를 화려한 가면과 의상 등 시각적인 요소와 현란한 음악적, 청각적 요소 그리고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태국에서 국왕을 칭할 때 “라마”라는 칭호가 바로 이 콘의 줄거리인 라마키엔에서 유래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즉 태국에서 왕의 칭호인 “라마”는 라마키엔의 주인공인 라마왕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라마키엔에서 주인공 라마왕자는 바로 세상의 혼란을 평정하기 위해 비슈누가 환생한 인물이다. 힌두교에서 비슈누는 세상이 혼란해질 때 여러가지 아바타라(Avatara)로 세상에 나타나 세상을 구원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불교국가인 태국에서는 비슈누 대신의 라마왕자를 부처의 전생으로 변용하였다. 이는 마치 많은 힌두설화들이 자타카(Jataka 즉 본생경本生經)이라는 형식을 통해 부처의 전생담으로 변모한 것과 유사하다. 즉 태국의 왕은 콘을 통해 탐마라차의 개념 즉 불교의 수호자임을 자처한다. 또 태국의 왕은 테라와차의 개념을 통해 힌두교의 비슈누의 경우처럼 현세에 부처로써 환생하여 타락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을 평안하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궁중가면극인 콘이다. 즉 콘은 왕의 신성(神聖)의 상징이며 태국문화의 정수이며 나아가 태국정체성의 정점에 서있는 것이다.
 종교에서나 볼수 있는 경직되고 엄숙한 왕권의 신격화는 왕의 절대적 권위를 믿는 순결한 믿음을 강조하는 쪽으로 발전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콘과 왕실의 권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를 2016년에 있었던 한 스캔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젊은 예술가들이 태국관광 촉진을 위해 제작한 광고영상이 문제가 되었다. 그 영상의 내용은 이들이 콘에 대표적인 등장인물 중 하나인 톡사칸(Thotsakan: 콘에서 악마들의 왕 역) 가면과 의상을 입고, 태국 곳곳을 누비며 제트스키를 즐기고, 툭툭(오토바이를 개조한 일종의 택시로 주로 서민들의 교통수단이나 요즘에는 관광명물로도 자리잡고 있음)을 타기도 하고, 카트라이딩을 하고, 지역 음식들을 만드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어찌보면 발랄하고 서민적인 이 영상이, 궁중가면무인 콘의 톡사칸이 무엄하게도(!) 제트스키나 툭툭을 타고 저속한 곳(!)들을 돌아다니는 것으로 태국 문화부가 지적하며, 영상의 40%를 편집하라고 명령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호응하여 태국 궁중 공연예술의 최대 지원단체인 반딧파타나신연구소에서도 우려의 목소리를 강력하게 표명하였다. 이에 이 영상물은 아무런 비판의 목소리나 저항도 없이 거의 즉시 ‘콘의 고귀함만을 보여주는 장면’만으로 재편집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콘의 태국에서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콘, 피쳇 클런천, 그리고 오리엔탈리즘

위의 사례와는 전혀 다른 경우도 있다. 바로 태국이 자랑하는 현대무용가인 피쳇 클런천(Pichet Klunchun)의 경우가 그것이다. 그는 16세부터 국보급 무용가인 차이욧 쿰마니(Chaiyot Khummanee)에게서 콘을 전수받았다. 그의 작품세계는 ‘태국 고유’의 미적 가치들 특히 콘의 현대화하는 작업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런데 그의 작품들 중에는 예를 들어 제롬 벨(Jérôme Bel)과 공동작업한 〈Pichet Klunchun and Myself〉에서처럼 종종 오리엔탈리즘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들이 있다. 본래 이 작품의 제목은 〈Made in Thailand〉 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주의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작품이다. 



피쳇 클런천 〈I am a Demon



  이러한 관점은 피쳇 클런천의 또 다른 작품인 〈I am a Demon〉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작품은 콘에 대표적인 등장인물 중 하나인 톡사칸(Thotsakan: 콘에서 악마들의 왕역)의 춤을 현대의 시각에서 재해석한 것으로 역시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이 강하게 담겨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서구인들이 흔히 동양인들에 대해 신비롭게 생각하는 명상(meditation)을 하는 듯한 동작에서부터 시작한다. 물론 이 장면을 악마에 접신하는(haunted) 장면으로 해석해볼 수도 있으나, 이러한 해석 역시 신비롭기는 마찬가지이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장면은 전통적인 콘에서 톡사칸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또 다른 작품인 〈Black and White〉의 경우도 오리엔탈리즘적 요소가 있는데, 이 작품은 태국문화를 넘어서 아시아적 요소를 담아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작품은 콘과 역사적으로 특별히 관계가 없는 중국의 악기인 ‘구친(古琴Guqin)’반주에 맞추어 시작한다. 사실 구친(古琴)은 동양의 판타지라 할 수 있는 무협영화 등을 통해 세계에 많이 소개된 중국의 악기이다. 물론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으나, 우선은 아시아적 요소들의 혼합에 대한 실험이 그 주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일련의 작품들은 콘을 현대화하고 세계화하는데, 자국 즉 태국과 나아가 아시아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서구적인 시각 즉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서 콘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태국 현대춤의 상징적 존재라고 할 수 있는 피쳇클런천의 경우 콘을 바탕으로 ‘태국전통의 현대화 그리고 세계화’를 꾀하고 있다. 이를 통해 태국 국가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보여준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콘의 현대화와 세계화’의 기저(基底)에는 태국인 스스로가 자신의 문화를 오리엔탈리즘 즉 ‘타자적 관점’에서 바라보거나 적어도 외부(특히 서구)의 시각을 의식하는 가운데 자신의 문화를 재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작업들은 태국에서 국가의 정체성의 확립에 일조함은 물론 태국인들 사이에서 자신의 고유문화가 세계에서 인정받는데 이바지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태국은 2006년 일어났던 18번째 군사쿠데타에 이은 2014년 5월 20일 19번째 군사쿠데타를 목격했다. 게다가 2016년 새로 등극한 현 국왕의 신망이 그리 높지 않은 상황에서, ‘세계가 인정한 현대적인 콘’은 태국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타이완의 국가정체성

우리가 흔히 대만 혹은 타이완이라 부르는 곳은 중국인가 혹은 독립된 타이완인가? 또 대만은 나라인가 아니면 중국의 지방정부인가? 이러한 타이완을 둘러싼 질문들은 오랫동안 타이완의 정체성을 시험하는 논의가 되고 있다. 타이완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면, 이러한 질문들이 타이완 내부에서조차 어떻게 가능한지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이 세계2차대전에서 패망한 후, 중국에서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패한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으로 피난하여 온다. 국민당과 중국(대륙)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의 일부’인 타이완에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피난온 것이다. 여기서 국민당 정부와 함께 중국에서 이주한 사람들을 ‘외성인(外省人)’이라 부른다. 한편 타이완에는 ‘본성인(本省人)’이라 불리는 이들도 있는데, 이들 대부분 명나라와 청나라시대에 타이완으로 건너온 이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본래부터 거주하였던 타이완의 원주민들과도 차이가 있다. 여기에 본성인들도 단일한 민족구성으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크게 중국 푸젠성 등지에서 건너온 민남어(閩南語) 혹은 타이완어(臺灣語)로도 불리는 언어를 사용하는 민난인(閩南人)들과 객가어(客家語)를 사용하는 객가인(客家人)들로 나뉘어져 있다. 당연히 이들 사이에 미묘한 긴장관계가 존재한다. 그렇지만 이들 본성인들은 본래 자신의 근거를 ‘중국(대륙)’이 아닌 ‘타이완(섬)’에 두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데 외성인들과 정체성의 차이가 있다. 게다가 일본제국의 식민통치를 경험하였다는 점에서 외성인들과 본성인들 사이에는 역사인식과 정체성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 본성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외성인들이 일본제국 대신 등장한 새로운 외세가 타이완을 점령하는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타이완의 역사는 곧 식민지의 역사라는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   본성인들은 타이완은 역사에 등장하면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외부세력에 의해 통치를 받아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타이완은 근세 이후에야 세계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물론 이 섬에는 그 이전에도 원주민이 살고 있었지만 문자가 없어, 정확한 역사를 알기 어렵고, 400여년 전 현재 타이완인의 주류인 본성인들이 중국에서 이주하면서 타이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다. 여기에 당시 타이완지역을 항해하던 포르투갈 상인들이 ‘포르모사(Formosa,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라 이름붙이면서, 세계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타이완 사람들 중에는 타이완을 종종 이포르투갈 명칭을 한자(漢字)로 표현하여 ‘미려도(美麗島)’라 부르기도 한다.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세계에 알려진 타이완은 곧 네덜란드(타이난, 가오슝, 핑둥, 타이둥지역, 즉 타이완 남부)와 스페인(지룽, 단수이지역, 즉 타이완 북부)에 의해 식민지가 되었다. 북부의 스페인세력을 몰아낸 네덜란드는 다시 중국 명나라의 몰락과 함께 피난한 세력의 우두머리인 정성공(鄭成功, 1624 ~1662)에 의해 타이완에서 물러난다. 중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정성공은 출생지가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로 본래 해적이었다가, 명나라의 잔존세력과 연합하여 정씨왕국(정식명칭은 동녕국東寧國)을 타이완에 건국하게 된다. 그러나 청나라가 침입하여 20여년 남짓의 정씨왕국은 멸망하게 되고, 청나라가 타이완섬을 통치하고 있었으나, 또 다시 청일전쟁(淸日戰爭) 후 승리한 일본이 타이완을 할양받아 이번에는 일본식민지가 되었다. 이런 이유로 본성인들 중 상당수는 타이완 역사는 외부세력에 의한 식민지역사라는 인식이 있으며, 중국에서 건너온 국민당 세력도 일본이나, 스페인, 네덜란드, 청나라와 마찬가지로 점령세력의 하나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본성인들의 상당수는 타이완은 중국이 아니고 중국에서 독립을 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반면에 외성인들은 이들 본성인들 중 상당수가 일제에 동조하여 친일행위를 한 매국노이거나, 혹 일제에 대항한 경우 공산주의자로 인식하고 있다. 일본은 타이완을 식민통치할때, 한국의 경우와는 다르게, 일본제국의 우수성을 알리는 ‘전시장(show Case)’으로 적극  활용하였다. 이러한 정책 속에서 상당수의 타이완사람들(즉 본성인)이 타이완은 물론 당시 일본의 꼭두각시(괴뢰국傀儡國)나라였던 만주국(滿洲國)의 관리로 대거 진출하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외성인 입장에서, 이들을 일제에 동조하는 친일세력으로 보는 것도 아주 근거가 없지는 않다. 이들 외성인들은 타이완이 중국의 일부이며, 언젠가는 공산화된 중국을 수복하고, 궁극적으로는 중국과 통일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이렇게 ‘타이완’에 대한 커다란 시각의 차가 존재하는 가운데, 국민당 정부와 함께 대륙에서 이주한 외성인들은 기존 타이완 사회의 주류였던 본성인을 차별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근대화된 교육을 받은 본성인들은 자신들보다 훨씬 전근대적이었던 국민당 정부의 만연한 부패와 노골적인 차별에 분개하기 시작하였고, 곧 외성인들과 본성인들은 타이완 사회곳곳에서 극심한 분열과 대립을 겪게 된다. 이러한 갈등은 1947년 2·28 사건이라는 타이완 전역에서 일어난 민중봉기로 나타난다. 이 사건으로 본성인 중 약3만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 이 사건은 1949년 타이완 전역에 발포되고 38년간 유지된 계엄령 속에 타이완에서 금기 중의 금기가 되었다가 1995년 당시 국민당 소속이지만 본성인 출신으로 구속된 경험도 있었던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이 최초로 희생자 가족에게 사과하였으며, 사건 발생 50주년인 1997년에는 중화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죄하였다. 그러므로 이들 본성인들의 외성인들에 대한 저항은 결국 국민당 정부의 독재에 맞서 항거한 민주화운동과도 연결이 된다. 여기에 이 봉기는 본성인들의 외성인들에 대한 더 나아가 타이완의 중국에 대한 저항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기에 타이완 내부의 복잡한 사정은 물론 외부적으로 현재 중국의 공세적 외교정책 속에 타이완의 입지는 나날이 좁아지고 있다. 타이완은 현재 정식수교국이 전세계에 17개 나라로 국제사회의 고아와 같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수교국이 전혀 없으며, 남아메리카에서는 파라과이 하나, 아프리카에서도 에스와티니 하나, 그리고 유럽에서는 바티칸 하나뿐이다. 바티칸조차도 언제 타이완과 단교를 하고 중국과 수교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현재 타이완의 국가정체성은 내외에서 심각하게 도전을 받고 있다.



클라우드게이트무용단과 타이완 정체성

타이완 사람들의 중국 본토에서의 분리독립과 타이완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노력은 사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은 타이완 최고의 안무가라고 할 수 있는 린화이민(林懷民, Lin Hwai-min)의 클라우드게이트무용단(Cloud Gate Dance Theatre, 雲門舞集)의 최근 작품들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클라우드게이트무용단은 한자로 ‘운문무집(雲門舞集)’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무용단의 이름 가운데 “운문(雲門)”이란 말은 본래 고대중국의 육악(六樂)의 하나를 일컫는 것이다. 이들 육악(六樂)은 바로 황제(黃帝)의 악(樂)인 운문(雲門), 요제(堯帝)의 악인 함지(咸池), 순제(舜帝)의 악인 대소(大韶), 우왕(禹王)의 악인 대하(大夏), 은(殷) 탕왕(湯王)의 악인 대호(大濩), 주(周) 무왕(武王)의 악인 대무(大武)와 함께 육악이라고 한다. 주지하듯이, 황제(黃帝)는 중국 한족(漢族)의 시조(始祖)가 되는데, 이런 점에서 클라우드게이트무용단은 그 정체성의 근거를 중국에서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클라우드게이트무용단의 여러 유명한 레퍼토리들을 잠시 살펴보아도, 이러한 사실들은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유명한 전설을 소재로 한 〈백사전(白蛇傳, The Tale of the White Serpent, 1975)〉, 중국의 유명한 고전소설 배경의 〈홍루몽(紅樓夢, The Dream of the Red Chamber, 1983)〉, 중국의 전통무술인 태극권을 발레에 접목한 〈수월(水月, Moon Water 1998)〉 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그러므로 클라우드게이트무용단의 시작은 중화(中華)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클라우드게이트무용단의 레퍼토리들은 점점 더 중국적이라기보다 타이완적인 작품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타이완 본성인들 중 하나인 객가의 민속음악을 사용한 〈도화(稻禾, Rice, 2013)〉, 타이완 가수들 혹은 타이완에서 인기있었던 대중음악들만을 사용한 〈여과몰유니(如果沒有你, How Can I live on Without You, 2011)〉, 그리고 작품 주제 자체가 ‘타이완’인 〈관어도서(關於島嶼, Formosa, 2017)〉 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이들 작품들은 중국 ‘대륙’이 아닌 타이완 ‘섬’에서 만나올 수 있는 작품들로 타이완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클라우드게이트무용단 〈관어도서(關於島嶼, Formosa, 2017)〉



  특히 최근작인 〈관어도서(關於島嶼, Formosa, 2017)〉는 클라우드게이트무용단과 안무가인 린화이민은 이 작품을 통해 중국과 대비되는 타이완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녹아있는 작품이다. 작품의 명칭부터 의미심장한데, 우선 한자명칭부터 살펴보면“도서(島嶼)”는 타이완이 대륙의 일부가 아닌 섬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관어(關於)’라는 표현은 한국어로 ‘∼에 관하여’라는 표현이다. 용법이 대체적으로 같은 표현으로는 ‘대어(對於)’라는 것이 있는데, 이 표현은 한국어로 ‘∼에 대하여’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관어(關於)’와 ‘대어(對於)’의 차이점이다. ‘대어(對於)’와 ‘관어(關於)’ 모두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끌어오는 작용을 하지만 ‘관어(關於)’는 관련되거나 영향을 끼치는 일에 쓰이고, ‘대어(對於)’는 대상을 가리키며, 관련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즉 〈관어도서(關於島嶼〉라는 제목은 ‘섬들 즉 타이완에 관계하여’ 혹은 ‘타이완의 관련하여’라는 뜻으로, 자신과 상관없는 대상으로 타이완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여기에 알파벳 제목인 ‘포르모사(Formosa,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의 경우 중국에서 유래한 명칭이 아니라 앞서 밝힌 것처럼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름이다. 이런 명칭은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이러한 사실은 공연 중 포르모사의 한자표기인 ‘미려(美麗)’가 노골적으로 무대배경을 장식하고 있다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의 내용과 사용되는 음악도 타이완의 정체성과 얼마나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이 작품의 시작은 바로 타이완 원주민 종족 중 하나인 푸유마족(卑南族, Puyuma people) 출신의 가수인 상푸이(Sanpuy)의 노래로 시작한다. 타이완섬 역사의 시작을 타이완 원주민에게서 찾는데에는 타이완 원주민의 문화는 혼란스러운 내성인 외성인 갈등, 중국과의 갈등같은 것보다 외부에서 볼 때 명확한 타이완 정체성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노래에 맞추어 텅 빈 무대에서 22명의 무용수들은 타이완 원주민들의 활기를 보여준다. 
  〈관어도서(關於島嶼, Formosa)〉는 타이완의 역사, 풍토, 문화와 생활에 대한 것과 함께 아름다운 섬이라는 명칭과는 대조적으로 폭력적인 침략자들과 태풍, 지진 등 녹록치 않은 자연환경과 같은 어두운 이야기를 은유적으로 묘사한다. 두려움 속 이인무의 흔들리는 동작, 격변적 공포 가운데 독무, 외부에 의한 긴장을 표현한 군무가 펼쳐지기도 한다. 이 작품은 사실상 린화이민의 은퇴작품으로 춤을 통해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 작품은 타이완 정체성이 가장 잘 나타난 그래서 많은 타이완 사람들에게는 비공식국가(國歌)로 대접받고 있는 노래로 ‘비취색의 푸른 대만’이라는 뜻의 〈대만취청(台灣翠青)〉의 가사 [4]와 많은 점에서 닮았다. 타이완의 주권과 타이완 국가의 정체성이 대내외적으로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는 때, 안무가인 린화이민과 클라우드게이트무용단의 〈관어도서(關於島嶼, Formosa)〉는 지금까지 타이완의 좌절과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며, 타이완 사람들은 별을 올려다보고 끝까지 행진해 나아갈 것임을 은유적으로 나타낸다.

 

 


──────────
[1] 초등사회개념사전, p.38.
[2] Section 7: The King is a Buddhist and Upholder of religions.
[3] Section 6: The King shall be enthroned in a position of revered worship and shall not be violated. No person shall expose the King to any sort of accusation or action.
[4] 太平洋西南海邊 태평양 서남쪽해변에 있는
    美麗島台灣翠青 미려도, 대만은 푸르구나.
    早前受外邦統治 오래 전부터 외국의 통치를 받았으나,
    建國今在出頭天 지금은 나라를 세워 하늘로 머리를 내밀었네.
    共和國憲法的基礎 (대만)공화국헌법을 기초로 해,
    四族群平等相協助 네 민족이 평등하게 서로 돕네.
    人類文化世界和平 인류문화와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國民向前貢獻才能 국민들이 이바지하며 앞으로 나아가네.

 

 

─────────────────────────

 

 


■ 토론 지상 중계

 

김인아_〈춤웹진〉 기자

 


국내외 춤 현장은 변동하는 중이다. 이를 비평으로 ‘충실히’ 수렴하는 작업 또한 만만치 않다. 포럼의 토론에서 나타났듯이 이는 비평 시각에서 지속적으로 수행되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이날 진행된 난상 토론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는 힘들겠으나, 춤 현장의 변동을 반영하듯이 퍼포먼스, 다원예술의 개념을 중심으로 토론이 전개되었다. 그런 사정에서 지금의 한국춤 현장을 거론하기에는 시간의 제약도 있어 다음 기회로 토론을 미루었다. 당일 난상 토론의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유럽의 지금 춤작품에서는 언어 사용이 다반사로 진행된다.
• 유럽에서 심지어 춤 공연이라면서 언어만으로 진행되는 경우도 봤는데, 국내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했다.
•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는 관객의 몫이라고 생각된다. 결국 이런 것은 학습에 의해 이뤄지는 것 같다.  
• 연극이라면서도 대사가 한마디도 안 나오는 경우도 있다.
• 독일의 경우 특히 2015년~2017년에 중요한 사회적 이슈들이 무용 작품 안에서 이루어지고 그런 담론 형성을 목적으로 담론들을 구체화하고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서 언어 사용이 늘어나는 면이 있다. 독일에서 지난 3년간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작업들이 지원금을 많이 받았다.
• 유럽에서 다원예술이라는 양상을 정해놓고 지원하고 관리하는데 이런 작업들이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 춤과 다른 장르를 결합하는 방식을 한국에선 다원예술로 분류하지만, interdisciplinary Arts, multidisciplinary Arts, 퍼포먼스, 퓨전, 하이브리드, 크로스오버, 융복합, 심지어는 hypnosis(최면)라는 용어가 동원되기도 한다.
• 유럽에서 사용하는 퍼포먼스 개념과 한국에서 사용하는 개념은 차이가 있어 주의를 요한다. 댄스나 발레라는 용어도 프랑스어권, 스페인어권, 독일어권에 따라 의미나 뉘앙스에서 차이가 난다.
• 80년대 이후로 춤에까지 개념 논란이 일어날 만큼 춤도 아니고 부를 수 없는 공연 퍼포먼스가 대대적으로 등장했다. 기존의 전통적 미학으로써 설명하기 힘든 새로운 퍼포먼스나 새로운 장르가 계속 되어 왔다는 거다. 연극에서는 서구사회에서 약 50년 정도, 춤에서는 30년 정도 그런 시도가 축척이 되었는데 그런 새로운 시도로 축척이 되었던 걸 해석할 적에는 전통적인 이분법, 다시 말하면 안무자와 관객, 창작자와 관객 이런 관계로서 도저히 설명이 안 된다.
• 한국에서 다원예술이라는 용어가 나오기 시작한 게 2002-03년경으로서, 당시 인디예술가들이 자기 장르를 벗어나 다른 장르와 결합했던 그런 실험들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 용어의 개념에서 유럽 현장에서도 혼선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 국내에선 다원예술이 거의 공식적인 개념으로 쓰였고 공공 지원 사업에서도 그렇게 분류되어 힘을 발휘한 게 사실이다.  
• 유럽에선 현대의 작품도 재현하는 작업이 활발하다. 그것이 갖는 학습 효과는 매우 크다는 판단이 들었다. 
• 아시아권의 춤에서 현대화 작업이나 경향을 일률적으로 정리하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 최근의 한국춤을 두고 전통춤 하는 분들은 정체성이 없다는 지적이 있는데, 어쩔 수 없는 현실이고 사회의 흐름이기 때문에 부정만 할 수 없는 문제이지 않는가 한다. 우리의 정서와 우리춤의 얼, 특징, 장점, 매력을 어떻게 녹여낼 것인가가 문제일 것이다.
• 현대무용과 발레처럼 완벽한 분리가 돼야 하는데 한국춤하는 사람이 왜 꼭 전통춤을 춰야하는가? 창작 컨템퍼러리라는 마인드가 필요한 것 같고 민족춤을 토대로 한 컨템퍼러리로 가야 할 것 같다.
• 우리가 아시아 컨템퍼러리라고 스스로 이름 붙여서 하는 거를 서양 사람들이 봤을 때 이걸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을 의식하게 된다. 냉정히 말하면, 아직은 미국과 서유럽이 주도하는 시대이다. 한국 창작춤을 유럽의 프로그래머들은 거의 80퍼센트는 여전히 민속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강한데, 다만 미국에서는 좀 다르게 받아들일 것으로 본다.
• 춤 장르 분류에서 춤 테크닉 내지는 움직임을 기준으로 판단하기가 어려운 시대로서 춤계 일각의 테크닉이나 움직임에 집착하거나 얽매이는 태도는 바람직스럽지 않다. 
 
2019. 0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