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SPAF(1)해외공연 리뷰: 아크람 칸 컴퍼니 〈언틸 더 라이언즈〉
전통을 재해석하는 창조적 정신
방희망_춤비평가
 “사자가 자신의 역사를 가질 때까지, 사냥 이야기는 사냥꾼을 예찬하는 것 뿐이다(Until the lions have their own historians, tales of the hunt shall always glorify the hunter.)”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측은 폐막작인 아크람 칸 컴퍼니의 〈언틸 더 라이언즈(Until the Lions)〉(10월 12-13일. 아르코예술극장대극장, 평자 12일 관람) 홍보문구에 나이지리아의 작가 치누아 아체베의 발언으로 인용했지만, 이것은 그의 고향 이그보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 여러 나라에서 조금씩 표현을 달리하여 광범위하게 쓰이는 속담이다.
 맹수의 왕이라고 하는 사자조차도, 인간 사냥꾼 시점의 역사에서 주변부로 밀려나게 되어 있다는 진실- 그러나 인간 위주의 역사에서도 어떤 인종이 승자인가에 따라 그 불편한 진실이 또 한 번 반복된다. 식민지배를 경험한 작가가 뼈아프게 인용할 수밖에 없는 속담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힐러리 클린턴이 패배한 지난 미국 대선 결과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온갖 인종이 모여 사는 그 나라에서조차 흑인 남자는 대통령이 될 수 있어도 백인 여자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곤 했다. 무력을 앞세운, 침략과 정복으로 점철된 선천(先天)의 역사는 과연 herstory가 아닌 history였던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남성들의 화와 폭력에 희생되는 여성들의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오는 우리 사회도 물론이고, 최근에는 헐리우드에서도 성폭력을 경험한 여성들의 고백이 이어지는 만큼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직도 가장 약자는 여성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
 이런 점들을 생각해본다면 카티카 네이르가, 사촌지간인 두 가문끼리 힌두 신앙과 왕조의 정통성을 증명하려 들며 상잔을 벌이는 내용의 인도 고대서사시 ‘마하바라타’에서 주인공들의 곁을 스쳐가는 주변 인물들에 주목하여 새롭게 〈언틸 더 라이언즈〉를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와 닿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 특별히 아크람 칸이 천하무적 영웅 비슈마에 유일하게 맞서는 여인 암바의 이야기를 불러냈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비슈마는 평생 독신으로 살 것을 맹세했지만 주군의 아내로 삼을 여자를 납치해오는데 그녀가 바로 암바 공주이다. 암바는 이미 정혼자가 있었기에 돌려보내달라고 애원했고 순결한 채 돌아갔지만, 정혼자는 이미 순결과 명예를 잃었다며 그녀를 거절했다. 갈 곳이 없어진 암바는 다시 비슈마에게 아내로 받아달라고 청하지만 이미 독신을 서원한 비슈마는 차갑게 거절한다.
 이 모든 불행이 결국 비슈마의 납치에서 비롯되었기에 암바는 기필코 비슈마를 죽이겠다는 원한을 품게 되고, 적수가 없는 비슈마에 대항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암바는 복수를 위해 산과 들을 쏘다니며 온갖 고행과 수련을 거듭하다 죽어간다. 대신 쉬크한디라는 인물로 환생하는데, 쉬크한디는 본래 여자로 태어났으나 중간에 남자로 바뀔 것이라는 신탁을 받았고 그 신탁은 이루어져서 마침내 전장에서 비슈마와 조우하게 된다.
 원전인 ‘마하바라타’는 시종일관 비슈마의 위대함과 지혜를 칭송하고 있기 때문에 암바가 쉬크한디로 환생하고 그가 타인의 남성성을 얻어 남자가 되어 비슈마와 전쟁터에서 마주치게 될 것, 이 모든 것은 업보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운명임을 비슈마가 이미 꿰뚫고 있어 쉬크한디의 공격을 막아내지 않고 받아들여 죽음에 이른다고 그려내고 있다. 물론 쉬크한디는 주요인물이 아니기에, 막상 비슈마 앞에 선 쉬크한디가 무기력해지면서 영웅 아르주나가 대신 비슈마를 죽게 만든다는 묘사 또한 쉬크한디의 어리숙함과 연약함을 강조하고 영웅들의 영광을 더욱 드러내는 방향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웅이 아내를 얻는 방법의 하나로 납치를 미화하는 ‘마하바라타’는 인도인들의 철학과 신앙체계와 얽혀있어 단순히 페미니즘으로 재단하고 비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마하바라타’의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하는 비슈마라는 영웅의 긴 생애에서 찰나처럼 등장하고 언급되는 암바/쉬크한디라는 인물이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무척 매력적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전생의 복수에 대한 강렬한 염원을 간직하고 기억한 채 환생하여 결국 여자로 태어난 신체의 성별까지 바꾸어버리는 굳은 집념을 가진 이 캐릭터가, 신과 영웅들에게 순종하고 아내와 어머니의 도리를 다하는 것을 여인의 미덕으로 치는 ‘마하바라타’에서 대단히 돌출된 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아크람 칸의 연출은 원전의 결말을 바꾸었다는 암시를 주며 플래시백 형태로 진행된다. 쉬크한디가 짐승의 걸음처럼 등장하여 무대 한켠에 솟아 있는 남자의 잘린 머리(아마 초연을 비롯, 유럽 무대에서 비슈마 역으로서 등장하는 아크람 칸의 모습을 본뜬 듯 민둥머리인 형태였는데 이번 내한 무대에서는 리안토가 비슈마 역을 맡았기 때문에 내용을 모른다면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를 전리품처럼 바라본다. 위에서 언급했듯 원전에서는 쉬크한디가 (감히) 비슈마를 직접 처단하지 못했지만, 오롯이 암바/쉬크한디와 비슈마의 관계에 집중한 이 작품에서는 쉬크한디에게 승리를 안겨도 괜찮은 것이다.
 이렇게 뒤튼 결말을 먼저 보여주고, 이윽고 암바의 납치라는 최초 사건으로 옮겨가 서사의 순서를 바꾼 〈언틸 더 라이언즈〉는 이야기의 진행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부당한 것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암바/쉬크한디의 투쟁, 비슈마와의 숨 가쁜 대련이 무대를 가득 메운다. 쉬크한디 역을 여성 무용수에게 맡기면서 튜닉에 바지를 입혀 비슈마 역의 남성 무용수와 같은 스타일이 되게 한 것은 원전이 지정한 성별의 경계를 넘겠다는 의도이다.
 그리고 청순한 외모를 가진 암바(칭잉 치엔)와 이와 상반되게 날렵한 야수의 눈빛을 한 쉬크한디(크리스틴 조이 리터)가 본래 한 존재라는 것은 물론이고, 암바와 비슈마를 맞붙어 뒹굴게 하면서 악연으로 맺어진 둘이 결국 하나의 운명 공동체라는 이미지를 제시하는데 꽤나 공을 들인다. 

 


 남성 위주의 역사라지만 거듭된 환생을 놓고 보면 표면적인 성별은 아무 것도 아니며, 때론 양가적(兩價的)인 상대가 있어야 이쪽의 진가도 제대로 드러나는 법이니 제아무리 잘난 영웅이라도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 죽음을 불사한 투쟁으로 자신의 의지를 지키고자 하는 데는 남녀가 따로 없으며, 무용수들이 뒤엉킨 모습처럼 삶과 죽음도 그 경계를 구분할 수 없다.
 적어도 이 무대 위에서는 성별 구분 없이 대등한 카탁 춤의 전사들이 되어 펼치는 치열한 몸싸움이 가변적인 물질계를 초월하라는 〈마하바라타〉 속 ‘바가바드기타’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행하는 듯하다.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을 묵은 거대한 나무 밑둥으로 판을 깔고, 그 주위를 에워싸며 때론 빙빙 돌면서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는 뮤지션들의 적극적인 개입- 이 자체가 〈마하바라타〉라는 고전이 가진 권위에 재접근하며 아크람 칸 컴퍼니가 관객에게 요구하는 자세이다.
 우리 공연장의 한계로 프로시니엄 버전으로 감상할 수밖에 없었지만, 초연이 이루어진 라운드하우스에서처럼 무대를 객석이 둥글게 감싼 형태라면 승자 위주의 역사가 강제하는 하나의 관점에서 벗어나 다각도로 판 위의 인물들을 살펴보자는 원작 〈언틸 더 라이언즈〉의 취지에 제대로 부합했을 것이다. 

 


 한편 아크람 칸이 13세에 피터 브룩이 연출한 장대한 연극 ‘마하바라타’에 출연했었다는 사실은 〈언틸 더 라이언즈〉를 이해하는데 상당히 흥미로운 곁가지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의 문화유산을 제대로 우대하겠다는 브룩의 조심스럽고도 경외에 찬 접근이 오리엔탈리즘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 것을 노정하고 있었다면, 태생과 성장에서 두 문화권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었던 칸은 상대적으로 비판에서 자유로운 상태에서 오히려 거리낌 없이 그것을 무대로 가져올 수 있었다.
 ‘마하바라타’라는 소재, 아르메니아, 방글라데시, 인도 등의 전통 민요와 각국의 전통 악기를 거의 그대로 차용한 음악, 흑인 혼혈과 아시아 무용수들을 중심에 세우는 정공법으로 과거 ‘제3세계’라 불리던 지역은 적어도 칸의 무대에서는 열외가 아니게 되었다. 공연을 접한 관객들이 원전 ‘마하바라타’에 갖게 될 관심을 생각하면, 칸은 모처럼 ‘사자들’에게 발언의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이번 내한공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결국 전통을 흡수하고 권위에 도전하며 역사를 새로운 시점으로 기술하는 아크람 칸 팀의 창조적 정신 그 자체였다. 마당에 터를 벌려 무대 객석 구분 없이 공간을 쓸 줄 알았던 우리가 어찌된 일인지 프로시니엄 무대만 고집한 통에 본래 작품의 원형무대를 들여 올 변변한 극장 하나 구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갖가지 자유롭고 변칙적인 연출이 성행하는 이 시대에 말이다. 
방희망
2013년 제1회 한국춤비평가협회 춤비평신인상을 통해 춤비평가로 등단했다. 현장 비평가로 다양한 춤 공연에 대한 비평작업을 하고 있으며, 한국춤비평가협회 정회원, <춤웹진>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방희망
2013년 제1회 한국춤비평가협회 춤비평신인상을 통해 춤비평가로 등단했다. 현장 비평가로 다양한 춤 공연에 대한 비평작업을 하고 있으며, 한국춤비평가협회 정회원, <춤웹진>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7. 11.
사진제공_CHUNG YOUSUK/SPAF2017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