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표지_서울세계무용축제 SIDance 20년
이종호_SIDance 예술감독
SIDance는 한국의 춤계를 대표하는 브랜드이다.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춤을 인식시키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한 비평가가 시작한 축제는 20년 동안 세계의 춤을 한국으로 들여오고, 한국의 춤을 세계로 내보내는데 기여했다. 시댄스 20년의 면면과 앞으로의 향방을 3개의 꼭지에 담았다. (편집자 주)




■ SIDance 20년(1) 예술감독이 말하는 20년 이후

20 + 20, 자화자찬성 중간정리와 미래에 대한 생각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는 ‘꼭 하고 싶다’는 마음과 ‘꼭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1998년 태어났다. ‘하고 싶다’는 것이 개인적 욕구나 취향의 발로라면 ‘해야 한다’는 것은 좀더 공익적 발상이다.
 개인적인 동기부터 말하자면, 축제는 나에게 하나의 꿈이다. 꿈이란 이루고 싶은 욕망을 뜻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글자 그대로 꿈결같이 흘러가는 그 무엇이라는, 축제의 속성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1960-70년대 트윈 폴리오(송창식-윤형주)가 우리 말 가사로 옮겨 불렀던 밀바의 <축제의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단번에 내 마음을 알아줄 것같다(모르는 분은 꼭 한번 들어보시기 바란다). 처음엔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그리고 나중엔 실제 무대를 통해 숱하게 접했던 유럽의 축제들, 왜 우리에겐 베로나, 잘츠부르크, 몽펠리에가 없을까. 왜 한국에선 막이 내린 뒤에도 발길이 돌아서지 않아 밤새 머물고 싶은 그 꿈결같은 시간들에 젖어들 수 없단 말인가. 유럽처럼 고성과 아름다운 숲이 없어서? 우아한 이탈리아식 극장이 없어서? 프로그램이 빈약해서? 어쨌든 우리도 만들어보자.
 게다가 내게는 아무래도 다소간 프로그래머 혹은 큐레이터 기질이 있는 것같다. 중고등학교 시절 매년 가을이면 선후배들과 함께 문학의 밤을 준비하며 설레었고, 모두들 떠나고난 문예반실에 혼자 남아 작은 칠판에 <이탈리아 가곡의 밤> 음악회 프로그램을 만들어 넣으면서 1.베냐미노 질리 <귀에 남은 그대 음성>, 2.페루초 탈리아비니 <물망초> 하는 식으로 끄적이며 수 십 곡 씩이나 채워넣곤 했으니 말이다. 이런 버릇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해서 지금도 컴퓨터 앞에 앉아 내년 시댄스 프로그램을 짤 때면 각종 근심걱정이 일거에 사라지는 것은 물론 짜릿한 희열까지 맛보곤 하는 걸로 보아 거의 중독성인 듯하다.
 이어 ‘공익적’ 측면을 얘기하자면, 필요한 일인데 아무도 안한다면 나라도 나서야 한다는 이상한 의무감 같은 것이 내게는 있다. 지금이야 내 능력의 한계도 느끼고, 목숨 걸고 항거하는 독립투사형 인간이 못된다는 사실도 잘 알지만 그래도 여전히 개인보다는 공공이 우선이라는 신념은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나름 무용계의 공익을 생각하면서 만든 것이 시댄스라고 봐주면 고맙겠다. 시댄스를 시작하고 몇 해 지나서 어떤 무용가가 “(기자/평론가로서) 그만큼 펜대를 휘둘렀으면 됐지, 무슨 권력이 부족해서 축제까지 만드느냐”고 무지막지하게 달겨들 때의 충격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축제가 권력으로 보이셨군요. 그게 아닌데요, 선생님.
 1990년대, 무용수들의 기량은 국제수준을 향해 치솟고 있었지만 전반적인 창작수준은 여전히 B급을 벗어나지 못했고, 다른 장르에 비해 현저히 낮은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위치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는 무용인들의 표정, 왜 춤을 추느냐고 물으면 “좋아서요”가 대답의 전부이던 의식수준, 더구나 국제 무용계의 흐름에 대해선 글자 그대로 ‘남의 나라’ 이야기 듣듯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판에 내 어줍잖은 평론이라는 게 과연 얼마나 소용이 될까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결국 뭔가 좀더 직접적이고 현장적인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일로는 축제가 가장 적합해 보였다.

 


 사실 1980년대 초반 무용평론가라는 꼬리표를 달기는 했지만 무용은 내게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소년시절부터 깊이 마음 두었던 문학이나 시민회관(세종문화회관), 국립극장(명동 예술극장)을 휘젓고 다니며 구경했던 연극, 음악 등에 비하면 무용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중학생 때 처음 본 민속무용 공연은 한 마디로 닭살돋는 유치함 그 자체였고 이후 무용은 내 관심대상 목록에서 완전 삭제됐었다. 시간이 흘러 대학 졸업 후 초년병 기자 시절, 취재차 관람했던 빠리 오페라 발레단의 현대발레 공연을 보면서 상당히 놀라긴 했지만 말이다. 외국의 무용기사를 번역해 드리면서 인연을 맺게 된 <춤>지 조동화 선생의 강권으로 무용평론이라는 걸 하면서도 떠날 채비는 항시 대기상태였다. 다른 일들에 비해, 그리고 다른 예술분야에 비해 무용은 여전히 작고 시시해 보였으니까.
 그런데 웬걸, ‘세월이 약이겠지요’가 아니라 ‘시간이 마약이네요’였다. 발목에 찰랑거리던 물이 무릎 지나 허리까지 올라오는 것처럼 시간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게다가 나의 어줍잖은 글에 대해 호의적 반응을 보이는 무용가들도 없지 않다보니 마음 한 구석엔 늘 무용인들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떠나려는 남자에게 계속 정성을 바치는 여자, 혹은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여자에게 매일같이 선물을 보내는 남자가 거기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게 시댄스는 무용가들에게 바치는 감사와 애정의 꽃다발이기도 하다.
 축제를 만든 동기에 대해 길게 늘어놓았으니 그동안 겪었던 즐거움과 괴로움, 보람과 아쉬움 따위 개인적 감상은 생략하겠다. 게다가 그런 감정들이란 좋은 축제를 만들려는 안간힘, 그러나 능력부족과 여건의 미흡, 심지어는 주변 일각의 질시와 폄훼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상황으로 인해 앞으로도 두고두고 겪어야 할 것임이 분명하기에 그저 ‘일하는 자의 업’정도로 치부해 두고자 한다. 그보다는 시댄스가 그동안 걸어온 길을 간략히 정리하고 향후 발전방향에 대한 주변의 조언을 구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한다.
 어차피 자화자찬이 되겠지만, 그동안 시댄스가 무용계에 기여한 바가 있다면 다음 몇 가지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우선은 국제 무용계의 조류를 접하기 어려웠던 1990년대 후반, 국내 무용가와 관객들에게 ‘선진 현대무용’을 집중 소개했다는 점이다. 무용가들에게는 창작수준을 높이기 위한 지적인 자극을, 현대무용을 재미없고 난해한 장르로만 여기던 일반 관객에게는 무용에 대한 색다른 체험과 해석의 기회를 제공하려 애썼다. 일부 무용가들은 “세련된 외국제품을 들여오면 누가 국산품을 사겠느냐”며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우리 산업이 뒤져있을 때에는 일단 선진제품을 들여다가 분해조립하면서 배우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언급하고 싶은 것은 장기간 미국 무용의 일방적 수용과 따라하기에 젖어 있던 우리 무용계에 유럽의 창작경향을 폭넓게 소개하는 한편 그동안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던 아프리카, 중남미 등 또다른 권역의 작품들까지 꾸준히 선보임으로써 세계문화의 다양성을 인식시키려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 스위스, 핀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등 과거에 잘 몰랐던 현대무용 강국들을 차례차례 지속적으로 소개한 것도 언급할 만한 일이다. 

 


 둘째, 인맥과 학맥, 파벌 중심의 무용계에서 소신과 개성을 드러내기 어려웠던 젊은 안무가들을 위해 <젊은 무용가의 밤> 등 프로그램을 마련, 기득권자들의 눈에는 거북한 반항아일 뿐이던 ‘미운 오리새끼’들에게 공연 기회를 주려고 노력했다. 이는 1980년대 중반 결성돼 한동안 활동했던 매초토(평론가, 기획자 등 비실기 무용인 모임)의 취지와도 일맥상통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때문에 기득권층 일부로부터 갖가지 비상식적 공격을 당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셋째는 무용의 사회성 획득과 춤의 대중화를 위한 몇 가지 시도이다. 기존의 극장공간을 벗어나 길거리나 공원에서 직접 관객에게 다가가는 <춤추는 도시>, 2003년부터 몇 년간 시도했던 <디지털 댄스 페스티벌(디댄스)>, 거리의 춤에 머물러 있던 힙합의 무대예술화 격상을 위해 현대무용과의 결합을 추구한 <힙합의 진화>, 아동무용이 전무하다시피 한 국내 실정에서 매년 한 편씩 소개한 아동청소년을 위한 무용 프로그램과 커뮤니티 댄스의 무대예술화도 언급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넷째는 국제합작이다. 무용계는 물론 공연예술계 전반에 거의 전례가 없던 199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48개국이 참가한 50건 이상의 국제 공동창작을 실현했다. 지금은 레지던시와 국제 공동창작이 무슨 기본 포맷인 양 유행하고 있지만 당시로서는 제법 새롭고 용감한 시도였다.
 마지막으로 한국 무용의 국제무대 진출을 위해 그간 시댄스가 기울인 노력도 언급하고 싶다. 시댄스의 대외 인지도와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지금까지 세계 37개국에 191개 한국 무용단을 진출시켰다. 믿기 어렵겠지만 시댄스 사무국에서는 본업인 축제 만들기에 비해 결코 적지 않은 노력을 한국 무용의 해외진출에 쏟고 있다. 말하자면 그 일을 어떤 계기가 있을 때만 하는 게 아니라 일상업무처럼 하고 있다는 얘기다.

 


 자랑 뒤에는 후회도 있다. 특정 주제나 특정 권역 작품의 집중소개에 집착한 나머지 작품의 질이 만족스럽지 않은데도 굳이 무대에 올렸던 일, 질적으로 다소 불만스런 작품을 비용이 아주 적게 든다는 이유로 프로그램에 넣었던 일 등은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또한 프로그래밍과는 별도로 바쁜 직장생활과 병행하다보니 사람들(사무국 스태프와 참여 예술가들, 무용계와 주변 친구들)에게 잘 해주지 못한 점은 두고두고 미안한 부분이다. 퇴직 이후에는 시간이 많아졌지만 이번에는 그동안 초대 받고도 다니지 못했던 외국 행사들을 한꺼번에 몰아치듯 돌아다니느라 여전히 그들에게 소홀했었다.
 그런 점에서 그동안 시댄스에서 함께 고생했던 동료들이 다른 곳에서 높은 평가와 인정을 받으며 잘 일하고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고맙고 자랑스럽다. 인턴을 제외하고는 최단기간 근무자가 4년, 길게는 십 수 년을 일했거나 하고 있는데, 근무조건도 열악한 일개 민간축제 사무국에서 그토록 잘 버텼다는 사실, 특별히 가르친 것도 돌봐준 것도 없는데 스스로 멋지게 성장했다는 사실이 내게는 가장 고맙고 미안하고 자랑스런 일이다. 

 


 축제는 끊임없이 진화하는 생명체여야 하며 시댄스 역시 그러하다. 시댄스를 처음 만들 때의 생각, 즉 현대무용을 중심으로 한 무용예술의 보급과 확산, 인식 제고라는 다소 계몽주의적인 취지는 그동안 어느 정도 성과를 본 것같다. 20년을 핑계삼아 내년부터는 시댄스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작정이다. 이제 교육이나 계몽은 오히려 내가 받아야 할만큼 그동안 우리 무용계가 큰 발전을 이루었으니 말이다. 나도 조금은 공익적 사명감(하긴 누가 지워준 것도 아닌데!)의 부담에서 벗어나 개인적 취향이란 것도 반영해볼 작정이다.
 대체로 시댄스 프로그램의 질적 수준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도(여기서 다시 한번 자화자찬하자면 시댄스 프로그램의 컬렉션 수준은 유럽이나 북미의 이름난 무용축제들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절대적인 예산 규모의 차이로 인해 유명 대형 무용단 초청이나 대규모 국제공동제작, 각종 부대행사 등에서는 그들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지만, 중소 규모의 작품 선정에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가짓수가 너무 많다, 정체성이 뭐냐는 지적이 종종 있어 왔다. 맞는 말이다. 우리 무용계에 빈 구석이 워낙 많다보니 그걸 축제 하나로 다 메꿔야 한다는 강박심리에 너무 많은 것을 시도했던 탓이며, 또한 그것이 그러그러한 취지에서 나온 그러그러한 시도라는 점을 충분히 홍보하지 못했던 탓이다. 한 가지 주제나 측면만을 파고들면 프로그램 짜기도 쉽고 정체성을 내세우기도 편리하며 홍보에도 유리하다는 걸 왜 모르겠는가. 우리 나라에 공공에서 운영하는 무용 전용극장 하나만 있었어도 일개 민간축제가 이 세상 고민 모두 짊어진 듯 야단법석 떨어가며 그 고생을 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나는 그런 지적을 받을 때마다 대학 때 은사이신 이휘영 선생님을 떠올린다. 국내 불어불문학 초기 상황에서 불어학과 불문학을 다 하셔야 했고, 불한사전도 혼자 만드셔야 했으며, 문학도 시 소설 희곡 등 모든 장르에, 시대적으로는 중세문학부터 현대문학까지 다 가르치셔야 했으니 언제 당신만의 관심 분야를 챙기실 수 있었겠는가. 자신만의 것을 즐기기를 포기하시고 한 학문분야 전체의 기초를 닦아놓으신 선생님 같은 분이 계셨기에 후배와 제자들이 분화되고 심화된 전공에 몰두할 수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처럼 보잘것없는 그릇을 선생님같은 분에게 견주겠다는 뜻은 아니니 오해 마시기를!)
 기대하시라. 내년부터 시댄스는 지난 20년간 신주 모시듯 떠받들었던 ‘모두 보살피기’ 정책을 미련없이 내던지고, 가고 싶은 곳으로 신나게 달려갈 것이다. 
이종호
한국춤평론가회 회장, 연합뉴스 상무를 역임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무용축제인 서울세계무용축제 예술감독을 맡아 활발한 국제교류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17. 10.
사진제공_국제무용협회(CID-UNESCO)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