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국내 춤과 영화의 상생을 생각한다
춤의 영화화, 왜 부진할까?


움직임과 아름다움의 시너지
 

사회: 다른 예술 분야와 마찬가지로 춤 활성화는 춤계의 중대한 화두이다. 춤 내부의 자구책에 못지않게 춤과 다른 예술 장르들과의 만남이 활성화에 기여할 점이 있다고 보아 이번 공동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었다. 마침 춤 영화 ‘피나 바우쉬’가 개봉되어 화제를 모으고 있는데, 프랑스에서 오래 영화영상을 연구하신 김혜신 선생님의 소감부터 듣고 싶다.

김혜신: 먼저 인상적으로 말씀드리면, 피나 바우쉬가 대중들에게 좀 어려운 대상이었는데 영화를 통해 친근한 대상으로 바뀐 것 같다. 안무가 피나 바우쉬와 감독 빔 벤더스, 두 대가의 만남도 그러하지만, 3D 기술로써 표정, 물방울, 사운드 등을 입체적으로 탁월하게 표현한 점에서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리라 본다. 그래서 우리 영화계가 춤을 대하는 시각에서 어떤 전환점이 되기를 바라는 기대도 크다.
 


사회
: 사회자도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의 소감을 들으며 뭔가 고무된 듯한 느낌을 받곤 하였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아시다시피, 영화와 춤은 미국을 중심으로 매우 많이 결합된 결과 춤 영화라는 장르도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활발치 않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거론하기 전에 먼저 춤 영화의 일반적 특성을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영화평론가이면서 춤 공연도 자주 보는 장 선생님 입장에서는 어떤 생각이신지 듣고 싶다. 


장석용: 주간지 시네 21에서 춤이 잘 활용된 영화를 선정한 적이 있다. 거기서 ‘분홍신’ ‘자유의 댄서’ ‘블랙 스원’ ‘열정의 무대’ ‘더티 댄싱’ ‘토요일 밤의 열기’ 등이 선정되었다. 그외에도 ‘룸바’ ‘맘마 미아’ ‘스텝업’ ‘허니’ ‘즐거운 인생’ ‘쉘위댄스’ ‘백야’ ‘빌리 엘리어트’가 쉽게 떠올려지고 한국에서도 춤영화가 더러 제작된 바 있다. 비보이와 발레리나의 관계를 그린 ‘스텝업’처럼 4, 5편 연속되는 것은 춤 관객층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춤은 독자적으로도 아름답지만 다른 매체와 어울릴 때 상관성이 높아져 시너지 효과를 낳기가 수월한 것 같다. 그렇다면 국내 춤계 활성화를 위해서도 춤이 인접 장르와 결합할 필요가 있는 것은 물론이다.
 

 

사회: 영화와 결합함으로써 춤이 받을 수 있는 효과는 무엇일까?

장석용: 춤은 우선 몸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국의 TV 연속 다큐 프로그램에서 몸의 아름다움을 다룬 적도 있다. 춤은 디지털이 갖지 못하는 특성이 있다. 움직임과 커뮤니케이션 소통의 스킬 측면에서 몸을 쓴다는 것은 춤의 엄청난 강점이다. 대개의 춤 영화는 이 점에 초점을 맞추어왔다.

김혜신: 춤은 그냥 몸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도 보여주므로 몸과 움직임 둘을 접목하여 새로운 효과를 드러내는 것이다. 쉽게 말해 그런 효과나 아름다움을 영상화하는 것이 영화 속의 춤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사회: 그러면 춤 영화에서 움직임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김혜신: 춤 영화는 움직임을 카메라로 포착하는 장르이다. 현대는 움직임에 대한 관심이 큰 시대인데, 현대영화는 삶 속에서 전개되는 움직임, 그리고 감정 및 감성과 움직임이 표현하는 순간 포착에 더 관심을 갖는다. 이모션(emotion)은 모션의 의미를 내포한다. 이 낱말은 움직임으로써 감성을 움직이고 또 감성 속에 이미 움직임이 있다는 뜻을 함축한다. 피나 바우쉬의 춤이 현대영화와 통할 수 있는 이유로 다음의 점을 들 수 있다. 피나 바우쉬가 말했듯 무엇이 몸을 움직이도록 하는가, 무엇이 관객의 감성을 움직이는가 하는 점을 기반으로 이모션을 생각하게 된다. 현대영화는 그런 순간을 포착하는 경향이 강하다.

사회: 흥겨운 춤 장면을 담은 영화도 물론 춤 영화의 범주에 속한다. 대개 춤 영화 하면 이런 유형의 춤 영화를 연상하기 쉽다. 긴 영화 역사에서 춤 장면을 나열하는 것이 초기 경향이었고 오늘날에도 그런 영화들이 적지 않지만, 움직여야 할 이유를 중심으로 영화를 엮어가는 것은 그런 경향들과 분명 차이가 난다.


춤의 에피파니를 그려야
 

김혜신: 춤 영화는 그냥 동영상이 아니라, 엄밀히 말해 무엇이 움직이게 하는가에 대한 의식을 담아야 한다. 이를 전제로 다시 생각하면, 춤 영화에는 움직임의 에피파니(epiphany) 같은 것이 있다. 에피파니는 사전적 의미로는 어떤 순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초기 영화에서 루이 뤼미에르는 움직임과 빛 사이의 관계, 움직이는 몸과 빛이 함께 빚어내는 어떤 에피파니를 이미 보여주었다. 로이 풀러의 춤을 뤼미에르가 파리에서 촬영한 것이 많은데, 그가 촬영한 것을 보면 현대적 착상에 가까운 것 같다. 이들 장면을 보면 의상을 빛을 투사하는 스크린처럼 사용한다든지 채색 등 퍼포먼스적 특성이 두드러진다. 또 뤼미에르는 리옹 거리에서 춤추는 장면들도 많이 묘사했다. 움직임, 빛, 감성, 에너지 이러한 것들이 결합한 순간들이 연출하는 에피파니가 있다. 그런 것들이 관객에게 주는 즐거움은 굉장하다. 영화의 흥행적 요소 가운데 하나가 논리성을 능가하는 에너지나 삶의 움직임일 것이다. 영화와 춤이 다른 장르일 것 같지만, 사실은 시간 차원에서부터 만나는 지점이 있을 테고, 이런 점에 착안하여 국내에서도 고수준의 춤 영화가 나왔으면 한다. ‘피나 바우쉬’에서 보듯 현대영화와 현대춤이 공유하는 지점은 많은데, 두 장르가 보다 가까워져야 할 것이다.

사회: 에피파니 착상이 흥미롭다. 이 말을 달리 압축하면 감성의 총체적 터뜨림 혹은 파열 정도가 될 것 같다. 춤이 가진 제반 요소를 심도 깊은 에피파니로 이유 있게 전달한다면 춤은 확장성을 더욱 가질 것으로 믿어진다. ‘피나 바우쉬’는 이 점에서 3D 기술로 많은 득을 보는 편이다.

장석용: 영화에서 스토리 없이 움직여서 이미지 춤을 만드는 방법이 있을 것이고, 스토리에 맞춰 춤을 만드는 길이 있을 것이다. 어떤 춤이 낫다고 단정할 수 없이 제각각 역할이 있다. 근래의 예로서 가수 싸이의 경우에서도 춤의 잠재력은 이미 입증되었다. 굳이 여성들이 아니라 남성들도 출 수 있는 것이고... 역할을 바꿔 춤추는 것도 영화적 흥미를 돋우는 방법 중의 하나일 것이다. 영화에서 많이 실현되어 왔지만, 춤의 잠재력은 엄청나다. 그런데, 예술 장르 간의 분리부터 반성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선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캘거리 동계올림픽의 조명 빛이나 움직임들이 빚어내는 시각적인 것이 매우 강렬했던 데서도 보이지만, 통합의 효과는 상상을 초월하는 점이 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춤에 이미 영상과 음향이 있지 않은가. 특히 사운드가 함께 하지 않으면 매우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춤은 성립하지 않을 것 같다. 또 IT기술을 이용하여 전세계 영화관에서 동시에 춤을 상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튜브를 통해 얼마든지 알릴 수 있다. 서로 호흡을 맞출 방법은 자꾸 개발되고 있다. 다른 매체와 결합한다면 춤은 테크닉뿐만 아니라 디지털 영상 측면에서도 매우 탁월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투자도 수월하게 유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계나 춤계나 고정 관념을 타파하고 시대정신을 함께 모색해야 한다. 코믹성을 유발하는 춤이라도 역동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사회: 많은 영화들이 춤의 그러한 잠재력을 보여주었는데, 우리 손으로 그런 영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더라도 영화의 시각에서 춤의 잠재력을 더 거론해보았으면 한다. 영화와 춤은 근원적으로 가까웠다. 영화 발명 초창기에 동영상을 갖기 위해 춤을 자주 찍었고 역사적 자료로 많이 전해진다. 물론 영화 초창기에 춤이 아니더라도 움직이는 장면을 많이 찍었다. 열차가 객석으로 무섭게 돌진해 오는 듯한 영상이 대표적 사례이다. 그런데 영화에서의 에피파니 중에서도 사람의 움직임이 유발하는 에피파니는 호소력이 특별하다.
 

 

김혜신: 초창기 영화 발생기는 미술의 인상주의와 함께 로이 풀러나 이사도라 덩칸 같은 사람들의 비(非)발레적인 새로운 춤이 태동하던 때였다. 영화 속에서 그들의 움직임과 인상주의적인 빛의 에피파니가 있었다. 인상파 미술은 지금도 대중적으로들 좋아한다. 감성적인 움직임, 충만한 에너지 그리고 그런 데서 조성되는 에피파니가 뤼미에르 당시 영화에서도 발견된다. 발레 같은 틀에 박힌 움직임이 아니라 자연스런 움직임들이 돋보였다. 영화에서는 대개 서사 구조가 일차적 관심사일 것이다. 그런데 저는 영화에서의 모든 동작이나 움직임을 춤의 일종으로 해석한다. 무용적 소재나 공연 장면을 영화로 찍을 수 있겠지만, ‘피나 바우쉬’ ‘그녀에게’ 영화 등을 통해 피나 바우쉬가 대중들에게 어려운 대상을 벗어나 친근한 대상으로 바뀐 것 같다. ‘그녀에게’를 감독한 스페인의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피나 바우쉬가 자신의 영감의 원천이라고 했다. 어떤 춤 주제를 굳이 택하지 않더라도 이미 그의 영화 속에는 춤이 배여 있다는 말이다. ‘그녀에게’에서 바우쉬의 ‘마주르카 포고’ 장면이 나오고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도 바우쉬의 작품 장면이 나온다. 바우쉬와 알모도바르, 두 사람 사이에 개인적 친분이 있어 춤을 알게 되면서 영화에 가져 올 수 있는 것에 대해 눈뜨게 되었다. 알모도바르가 영화를 보다 심도 깊게 하고 파장을 복합적으로 처리해서 세계적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는가. 한국 영화에서도 변혁 감독의 ‘인터뷰’란 작품을 보면 한국적 춤 몸짓으로 끝내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는 한국적 몸짓 제스추어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한국적인 것이라 할 때, 서사뿐 아니라 제스추어나 동선도 중시되어야 할 것이다. 영화 속에서 한국적인 것을 접목하거나 그것을 영화적 영감의 원천으로 삼는 시도가 따라주어야 할 것 같다. 춤과 크로스오버하는 많은 실험이 필요하다.

사회: 예술을 대할 때, 서사를 앞세워 이미지를 무시하거나 간과하는 경우는 흔하다. 영화 소개 글에서도 그런 점을 많이 느낀다. 둘 사이에서 균형 감각이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화면 분석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화 해설을 보면 이미지의 질감에 대한 언급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이 대체적인 판단이다. 그런 질감은 부분적으로 글에 곁들이는 사진 이미지가 대신하기도 한다. 다시, 왜 영화에서 춤인가고 묻는다면, 서사만으로 그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춤 특유의 에피파니를 내세우지 않을 수 없다. 서사를 돋보이게 하거나 서사에 필연성을 부여하는 것이 에피파니일 텐데, 그에 대한 언급이 무시되거나 소략하면 해설에서도 느낌이 빈약해지기 쉽다.

장석용: 춤 특유의 에피파니를 잘 살려야 춤이 돋보이는 영화라 할 텐데, 에피파니를 위해 우선 생각할 점은 춤이 연기라는 사실이다.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는 우선 클로즈업 등을 통해 심리를 포착해내는 그런 영화라 하겠다. 표정 연기와 전신의 움직임으로 산출되는 이미지가 하나의 피사체로서 음향이나 다른 요소와 결합하는 상태가 영화의 춤성을 좌우할 것이다.

김혜신: 흔히 춤은 몸으로 쓰는 시라 한다. 시가 주는 호소력이 매우 큰데도 요즘은 고급예술과 대중예술 막론하고 시적 요소를 간과하는 것 같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시를 매우 좋아하고 시집도 많은 편이다. 시적인 기질이 강하고 풍부하며 언어도 매우 직관적이다. 서술적 이야기가 담을 수 없는 것은 시적으로 형상화될 수밖에 없다. 언어의 구속으로부터 영상은 해방시키는 기능을 한다. 훌륭한 포스터 이미지는 모든 것을 압축한다. 영상에 대해 관대하며 포용적인 시각이 더 요구된다.

사회: 일단 서사가 마련되면, 춤이나 영화는 그것을 이미지로 전개해간다. 춤 영화에서 감독마다 이미지를 구현하는 방법은 물론 천차만별이다. 춤 영화에서 중요한 점은 춤의 에피파니가 풍부하거나 심도 깊을수록 서사의 호소력이 강화된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이미지를 읽어내는 습관이 단련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이처럼 춤과 영화가 통할 측면이 풍부한데, 영화를 춤으로 유인해 들이기 위해 춤계가 해야 할 바도 있을 줄로 안다.


확장된 영상 개념으로 대처해야
 

장석용: 제 개인적으로 춤에서 한국적인 것이 두드러질 필요가 있다는 점을 먼저 환기하고 싶다. 한글, 한국의 소리, 한지, 한국의 풍광, 한국의 근현대 시대상과 같은 소재 그리고 한국의 정서가 짙은 별도의 작곡 등등으로 춤계가 더 개성을 확보해야 할 것 같다. 그런 점을 이미지에서 돋보이는 것을 개발하는 작업도 병행하여 말하자면 한국의 독특한 춤 에피파니를 개발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이런 작업이 적었던 것은 아니며, 이제는 다듬는 데 힘을 모아야 할 것 아닌가 싶다. 여기서는 간접적인 사실이지만, 우리 중고등 학교 교과서에 등장하는 많은 시가 춤으로 옮겨졌다. ‘처용’ ‘황조가’ ‘공무도하가’ ‘서동요’ ‘찬기파랑’... 그리고 고전도 ‘심청’ ‘춘향’처럼 다수가 춤으로 옮겨졌다. 이들 소재를 충실도 높게 구현해서 영화인들이나 타 장르 사람들이 더 매력을 느낄수록 바람직할 것이다. 일반 관객들도 현대춤에 대한 안목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고 무용수 테크닉도 매우 우수하다. 남성 무용수들도 저변이 매우 두터운 줄로 안다. 무용수들이 국제 대회에서 계속 수상하고, 또 해외 무용단의 주역들도 늘고 있다. 이를 알리고 활용하는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 재원 확보도 필요한데, 그 역할을 할 사람으로서 무용계 중진들이 미래를 내다보고 투자 유치를 위해 좀 앞장 서야 할 것으로 본다. 한국 영화가 선입견 때문에 처음에는 굉장히 어려웠던 가운데 저변 확대를 위해 애썼다. 작은 영화 운동, 실험 영화, 독립영화 등 작업을 지속한 것은 다 아는 일이다. 춤계에도 전문적 아이디어, 적극적 지원, 자신감이 동시에 필요하다. 그래서 이들 잠재력을 발현하기 위해 타 장르와의 결합도 그 필요성이 더 커지고 있다.

 

 

김혜신: 춤계가 할 바를 지적하기 전에 영화계의 현안부터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춤계가 아무리 준비되어 있어도 영화계가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도 문제이기 때문이다. 국내 영화 관련 학과 커리큘럼은 촬영, 시나리오 등 산업이나 엔터테인먼트 측면에 치우친 것 같다. 공연과 춤을 미적으로 잘 포착해내는 고급 전문가가 드문 현실에서 그 방면으로 커리큘럼이 상당히 보완되어야 한다. 커리큘럼 폭이 넓혀져야 하고 또 대학 내에서 다른 장르 학과들 간의 교류도 활성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면 영상 전문인들이 언젠가는 춤에 참여하는 확률도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지금은 감독이나 제작사의 자발적 관심에만 기대다 보니 토양이 얕은 편이다. 영화 관련 학도들이 공연에 참여해서 자신의 기량을 다듬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영화 전공 학도들에게 공연과 영상의 차이를 인식시키고 또 영상을 필요로 하되 영상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분야가 있다는 것도 인식시켜야 할 것 같다.

사회: 단조로운 관계나 조직은, 말 그대로 단조로우니까 창의력을 제한해 버린다. 춤을 촬영하는 순간 무엇을 포착해내느냐 하는 것은 거의 본질적인 점이다. 작품의 내러티브를 이해하면서 어떤 에피파니를 드러낼 것인가의 과제가 시시각각 주어지는 것이 공연 예술 촬영 현장이다. 전문가가 아니면 해결하기 어려운 이 점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듯하다. 일례로, 폐쇄회로 TV 녹화하듯 하는 것이 촬영은 아니다. 폐쇄회로 TV 녹화 앞에서 1, 2분이면 이미 하품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것은 앵글에서 표현 즉 에피파니가 빈약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감독의 영상과 폐쇄회로 녹화물, 작가 사진과 증명 사진은 비교할 대상도 아니다. 전문 인력의 중요성을 재인식해야 할 것이다.

김혜신: 그리고 정책에서도 문화 산업 내지 창조 산업으로 인식해서 춤 영상방면으로 지원을 늘려야 할 듯하다. 최근에 어느 공공기구에서 한류 관련 강좌에 참여한 바 있는데, 거기에 춤이 빠져 있었다. 말이 길어지지만, 공공기구의 사업을 보면 연결될 만한 것도 분리된 경우가 대다수이다. 영화, 미술, 공연 분야들이 제 각각 고립되어 사업에서 서로 연계되는 경우는 참 드물다. 프랑스에서는 영화 영역이 매우 포괄적이다. 움직이는 것을 영상으로 다루면 일단 영화 또는 영상에 포함된다고 할 정도이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모든 동영상을 이론화해서 관리하는 시스템이 가능하다. CNC(국립영상센터)가 대표적 기관이다. 일례로 TV에 한번이라도 방영된 자료는 모두 디지털로 보존된다. 예술 채널을 탔던 것이 소장되는 것은 물론이다. 소장 자료 가운데 일부는 품질을 조금 떨어뜨려 연구자들에게 제공하기도 한다. 이에 비해 우리의 영화는 개념 폭이 좁다. 제도에서부터 그런 것 같다.


춤 전파 경로 다양해져야
 

사회: 듣고 보니, 춤에 대해 관심이 낮아 보이는 타 분야 사람들을 위해 춤이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반성하게 된다. 공연장에 가지 않으면 타 장르 사람들이 춤을 접할 통로는 없거나 매우 제한된 것 같다. 그러고서 타 장르 사람들이 춤에 관심을 갖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유튜브가 실현된 이래로 영상이 활발하게 이용된다. 우리도 해외의 많은 춤 단체 정보를 유튜브를 통해 얻는 게 사실이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영상이 공연을 대신할 수 없다. 그런데도 유튜브에서 춤을 비롯해서 영상을 서핑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공연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공연 이후에 공연을 대리할 구체적 수단은 영상을 빼놓으면 없다. 오늘날 기자재가 향상된 시점에서, 영상이 공연을 훼손한다는 것은 기우에 불과할 것 같다. 심지어 어떤 점에선 영상이 춤을 잘 살려내는 이점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영상이 중요해지는데, 현장에서 소홀히 하는 것이 사실이다. 객석의 관객은 무대 장면을 선별해서 보나 영상 스크린의 관람자는 카메라 앵글을 따라간다는 말이 있다. 이는 관람자들에게 영상이 춤을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나 속성을 가졌음을 나타낸다. 영상을 통해 오히려 춤을 더 잘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춤의 확산 측면에서 중시되어야 할 것이다. 영상의 가능성을 춤에서 선용하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적어도 국공립무용단이라도 공연 자료를 공연후 즉시 공개하여 작품 활동을 시민들 그리고 타 장르 사람들과 공유하는 관행이 정착되어야 할 것이다. SNS 시대에 무대 공연만으로 만족스런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장석용: 20세기 전반기에 프랑스의 앙리 랑글루아가 영화학을 개척하여 영상 이미지의 아카이브화를 만든 데서 영화학이 시작하였다. 춤의 학술적 연구도 아카이브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지 않나 싶다. 포스터 이미지를 보고 춤이나 시대를 복원하는 작업이 가능하다. 그리고, 제가 영화평론가인데, 애니메이션을 보러 가는 것조차 의아스럽게 여기는 경우가 우리 주변에서 드물지 않다. 영화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폭 넓은 인식을 하는 듯이 보여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다른 분야와 소통하지 못하는 단적인 사례이다. 또 춤이 영화와 잘 접목되지 않는 원인을 춤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는 말이다. 영화에 대해 개방성을 강조하는 것에 못지않게 춤 분야도 유능한 인재를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어야 할 것으로 본다.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것이 이제는 자연스런 현상이 되었으나 그러기까지 시행착오도 많았다. 영화계의 이런 경험들이 춤계 활성화에 많은 참고가 될 듯하다. 그러기 전에 기본적으로 영상 등을 통해 작품과 공연 자료를 소통하려는 의지부터 갖춰야 하지 않을까 한다. 지금 여러 분야에서 해외 진출의 조짐들이 점차 가시화되는데, 이럴 때 구체적 대안을 갖고 대처하면 좋을 것이다.
 

 

김혜신: 밋밋한 기록이 아니라 정수를 포착하는 전문가 양성을 위해 작품을 자주 접할 토대부터 갖춰야 한다. 파리의 국립 시네마테크에서는 월말에 춤다큐 영상을 상영하는 프로그램을 지속하였다. 그런 기반을 통해 우수한 대중적 작품이 나올 수 있다. 영화감독들 스스로 춤을 영화화하는 게 물론 바람직스럽고, 반면에 그런 사람이 양성되도록 춤계가 방안을 세울 것도 필요하다. 재능 있는 사람들이 공동 작업을 할 수 있는 풍토는 어느 분야에나 필요하다.

사회: 춤이 영화화되고 춤을 널리 전파하는 것은 춤계가 소망하는 일이다. 그런 현상이 자연스럽게 이뤄지기 위해서는 기본 토양부터 갖춰야 한다는 점이 오늘 좌담에서 특히 강조되었다. 요약하자면, 춤계에서는 열린 사고를 통해 춤 작품을 공유하고 타 장르에 대한 이해를 깊이하는 작업이 선결과제로 들어진다. 그리고 영화와 영상은 분리된 분야가 아니라 동질의 유사 분야라는 인식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굳이 거기에 오늘 좌담의 초점을 맞춘 건 아니지만, 춤 영화 ‘피나 바우쉬’ 때문에 새로운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 같아 조금은 고무적인 듯하다. 사회자로서는 3D 기술의 도입으로 춤 영화에 또 하나의 지평이 추가되었다고 본다. 물론 앞으로 깊이도 따라주었으면 한다. 아무튼 국내 춤의 영화화가 부진함을 씻기를 기대하면서 오늘 장시간 좌담에 참석하신 두 분께 감사드린다.

정리_ 김인아 객원기자

2012. 09.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