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broad

알리시아 알론소와 쿠바 발레의 그림자
장지영_국민일보 기자 / 공연 칼럼니스트

전설이 지다

지난 10월 세계 무용계 최대 뉴스는 쿠바의 전설적인 발레리나 알리시아 알론소(1920~2019)의 타계 소식이다. 98세로 세상을 뜬 알론소는 쿠바 발레와 거의 동일시됐는데, 이 정도 위상의 아티스트는 무용계만이 아니라 예술 장르 전반을 통틀어서도 찾기 어렵다.
 우리나라엔 10월 17일 타계 소식만 보도되고 19일 장례식은 보도가 안 됐는데, 외신을 보면 아바나에서 미구엘 디아즈-카넬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을 비롯해 2만명이 참여한 가운데 국장으로 치러진 것을 알 수 있다.
 알론소의 이름을 딴 알리시아 알론소 대극장 앞에 놓인 그녀의 관은 사람들이 놓은 흰 장미로 뒤덮였다. 디아즈-카넬 대통령은 “그녀가 떠났다. 그 빈 자리는 너무나 크지만 그녀는 누구도 넘어설 수 없는 유산을 남겼다. 그녀는 쿠바를 세계 무용계 최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고 애도했다. 이후 그녀의 관은 가족의 요청에 따라 가족묘지에 안치됐다.




ⓒBallet Nacional de Cuba-BNC official




 20세기 최고의 발레리나 가운데 한 명인 알론소는 후천적인 장애를 딛고 일어선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평상시 짙은 선글라스는 나쁜 시력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는 프로 무용수로 막 활동을 시작했던 19살 때 망막 박리증 진단과 함께 3번 수술을 받은 후 의사에게서 다시는 춤을 출 수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23살 때 무대로 돌아와 스타가 됐다. 그녀는 시력을 거의 잃었지만 무대조명과 상대 무용수의 어렴풋한 움직임 및 속삭임에 의지해 계속 춤을 췄다. 높은 평가를 받은 〈지젤〉을 비롯해 고전 레퍼토리 대부분을 섭렵한 그녀는 무려 70대까지 무용수로서 무대에 섰다.
 1920년 쿠바 아바나에서 태어난 그녀는 1940~50년대 지금의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BT)와 몬테카를로 발레 뤼스의 간판 스타였다. 냉전의 골이 깊던 1957년 그녀는 구 소련에서 객원 예술가로 공연한 첫 서반구 무용수이기도 하다.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공연하던 그녀는 고국의 무용 발전을 위해 1948년 자신의 이름을 딴 발레단을 설립했다. 1956년 발레단은 재정난으로 문을 닫았지만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쿠바 국립발레단으로 부활했다. 쿠바 혁명을 이끈 피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이 전폭적으로 지원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Ballet Nacional de Cuba-BNC official




 그녀는 평생 쿠바 발레에 헌신했다. 지난 1월 수석무용수인 비엔세이 발데스(42)를 후임으로 임명할 때까지 쿠바 국립발레단을 이끌었다. 지난해 5~6월에도 쿠바 국립발레단의 미국 투어를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그런데, 쿠바 발레의 발전을 전적으로 그녀의 공으로 돌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물론 그녀의 역할이 크긴 하지만 그녀 못지 않았던 조력자들의 기여가 잊혀지거나 과소평가되고 있어서다. 게다가 그녀가 오랫동안 예술감독을 맡는 동안 수많은 쿠바 무용수들이 망명을 택한 이유에 대해서도 언급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스타에의 길

쿠바 발레의 핵심인 쿠바 국립발레단과 산하 발레학교는 알론소 혼자 만든 것이 아니다. 바로 알론소의 첫 남편인 페르난도 알론소(1914~2013)와 그 동생인 알베르토 알론소(1917~2007) 형제와 함께 만들었다.
 부유하고 문화적 소양이 있는 집안 출신의 알론소 형제는 10대 시절 미국으로 유학 갔다. 당시 부유층은 쿠바의 불안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자식들을 해외로 보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1932년 아바나로 먼저 돌아온 알베르토는 발레 클래스에 다니기 시작했다. 피아니스트 출신으로 쿠바 음악 후원 모임을 이끌던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1935년 귀국한 페르난도도 알베르토가 다니던 발레 클래스에 다니기 시작했다.
 2013년에 출판된 페르난도 알론소의 전기 『페르난도 알론소: 쿠바 발레의 아버지』에 따르면 당시 발레 클래스에는 126명의 소녀와 알론소 형제를 포함한 소년 6명이 다녔다. 페르난도는 6살 아래의 어린 소녀와 사랑에 빠졌다. 소녀의 이름은 알리시아 마르티네즈 호요. 두 사람은 1937년 결혼했다. 이 소녀가 바로 알리시아 알론소다.
 동생 알베르토는 형이 귀국한지 얼마 안돼 유럽으로 발레 유학을 떠났다. 그는 러시아 황실발레단 출신으로 파리에서 발레를 가르치던 올가 프레오브라젠스카와 폴란드 출신으로 발레 뤼스를 거쳐 런던에서 발레 교사로 활동한 스타니슬라스 이지코우스키를 사사했다. 쿠바 출신으로 처음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1세대 무용수인 그는 발레 뤼스의 뒤를 이은 ‘바질 대령의 발레 뤼스(Les Ballets Russes de Col. W.de Basil)’에서 1936~1940년 주역으로 활동했다.
 알베르토의 활약에 자극받은 알론소 부부는 결혼 직후 전문적인 무용 교육과 커리어를 위해 뉴욕으로 이주했다. 알리시아는 1938년 딸을 낳았지만 조지 발란신이 세운 아메리칸 발레스쿨을 다니며 테크닉을 연마했다. 두 사람은 미국에 처음 왔을 때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1940년 영국에서 베라 볼코바를 사사하고 돌아온 뒤 갓 창단된 ‘발레 씨어터’(아메리칸 발레 씨어터의 전신)에 입단했다. 두 사람은 1948년까지 발레 씨어터에서 활동했으며, 동생 알베르토 역시 뉴욕으로 이주해 1943~1945년 주역으로 활약했다.




 

ⓒBallet Nacional de Cuba-BNC official




 그런데, 발레단에서 주목받기 시작하던 알리시아가 1941년부터 시력 저하 문제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병명은 망막 박리. 알리시아는 3번이나 수술을 받았고, 의사는 알리시아가 발레를 포기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리시아는 발레를 포기할 수 없었다. 남편 페르난도는 매일 그녀 옆에 앉아서 〈지젤〉의 지젤 역할을 손가락으로 가르쳤다. 수술 후 붕대를 감은데다 안정을 위해 움직일 수 없던 알리시아에게 자신의 손을 만지게 하는 방법으로 지젤의 스텝을 가르쳤다. 알리시아는 당시에 대해 “나는 마음으로 춤을 췄다. 앞이 안보이고 움직일 수도 없었지만 나는 지젤을 췄다”고 회고한 바 있다.
 하지만 수술에도 불구하고 알리시아의 시력은 계속 나빠졌다. 동료 무용수들의 모습조차 제대로 알아보지 못해 무대조명과 상대 무용수의 속삭임에 의지해 공연해야 했다. 그래도 발레를 포기하지 않은 그녀에게 1943년 〈지젤〉 주역 기회가 왔다. 당시 발레단 간판스타 알리시아 마르코바가 부상을 당하면서 그녀가 대타로 출연한 것이다. 당시 공연은 대단한 성공을 거뒀고, 그녀의 시력 문제까지 화제가 되면서 단번에 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그녀는 〈지젤〉 외에 〈백조의 호수〉 등 여러 작품의 주역을 맡아 평단과 관객을 매료시켰다. 당시 우크라이나 출신 발레리노 이고르 유스케비치(1912~1994)가 그녀의 파트너로 주로 활약했다. 그녀는 1948년 씨어터 발레를 나온 이후에도 유스케비치와 함께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 러시아 볼쇼이발레 등 세계 주요 발레단의 게스트 프린시펄로 초청됐다.




ⓒBallet Nacional de Cuba-BNC official




 알리시아와 알론소 형제는 1948년 쿠바로 돌아와 발레단을 만들었다. 당시 최고 스타였던 알리시아의 명성을 이용하기 위해 ‘알리시아 알론소 발레단’으로 이름붙였다. 페르난도가 총감독을 맡고 알베르토는 예술감독 겸 안무가가 됐다.
 알리시아 알론소 발레단은 초반엔 무용수가 부족해 발레 씨어터의 동료들이 객원으로 자주 출연했다. 하지만 점점 발레단의 평판이 높아지면서 쿠바 무용수들이 많아졌다. 발레를 배우려는 사람들도 많아져 아바나에 발레 아카데미도 열게 됐다.
 그러나 알론소 가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발레단 운영은 쉽지 않았다. 알리시아가 해외 무대 초청으로 받은 개런티를 발레단에 쏟아 부었지만 한계가 있었고, 결국 재정난으로 1956년 문을 닫아야 했다. 하지만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쿠바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로 쿠바 국립발레단으로 부활하게 됐다. 1981년 출간된 그녀의 자서전 『알리시아 알론소, 프리마 발레리나 아솔루타』에 의하면 카스트로 의장으로부터 발레단 운영 비용이 얼마나 필요한지 묻는 질문에 그녀가 10만 달러 정도라고 하자 20만 달러를 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발레 아카데미 역시 국립발레단 부설 발레학교가 됐다. 알론소 가족의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세 사람은 이념적으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추종자는 아니었다. 그저 제대로 된 발레단을 만들어 쿠바에 발레를 꽃피우고 싶다는 일념뿐이었다.


3인이 만든 쿠바 발레 스타일과 분열

러시아의 클래식 발레 스타일, 발랄한 서구 테크닉, 남미의 관능이 어울어진 독특한 쿠바 발레 스타일은 바로 세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다. 꼼꼼한 성격의 페르난도는 쿠바 발레 메소드를 정리하는 등 뛰어난 발레 마스터로서 후학을 길러냈다. 수많은 쿠바 무용수들이 페르난도의 트레이닝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알베르토는 안무가로서 여러 레파토리를 만들었는데, 1967년 볼쇼이 발레단에서 마야 플리세츠카야를 위해 안무한 〈카르멘 스위트〉는 쿠바 발레 스타일을 보여주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은 나중에 알리시아의 레퍼토리가 됐다.




ⓒBallet Nacional de Cuba-BNC official




 하지만 미국과의 관계 악화에 따른 쿠바의 고립과 함께 알리시아의 발레단 내 역할 독점은 세 사람 사이의 갈등은 물론 발레단 전체에 분란의 원인이 됐다. 게다가 70대까지 무대를 떠나지 않았던 알리시아는 자신을 제외한 다른 무용수들의 해외 활동을 막았다.
 발레단에 대한 알리시아의 권위적 지배는 수많은 무용수들의 망명을 초래하는 원인이 됐다. 1962년 알베르토의 아내로 무용수였던 엘레나 델 쿠에투가 두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망명을 해 버렸다. 또 1966년 쿠바 국립발레단의 프랑스 파리 공연 중 망명 무용수가 처음 나온 이후 해외 투어에서 망명 사건이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루돌프 누레예프, 나탈리아 마카로바,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등 구 소련의 스타 무용수들만큼 주목받지 못했지만 망명한 쿠바 무용수들의 수는 일일이 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연간 망명자가 10명 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우리나라에 보도되진 않았지만 지난해까지도 쿠바 무용수들의 망명 소식이 외신에 나왔다. 과거엔 예술적 자유와 다양한 작품에 대한 욕구 때문이었다면 최근에 경제적 이유도 적지 않다.
 쿠바 출신 망명 무용수들은 주로 미국행을 택한다. 발레단이 많아서 일할 기회가 많은 데다 쿠바 이민자나 망명자들이 많기 살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 마이애미에는 쿠바 출신들이 세운 ‘쿠바 클래식 발레단’이 있어서 망명 무용수들의 미국 정착을 돕고 있다. 쿠바 무용수 출신으로 1980년 망명해 쿠바클래식발레단을 만든 페드로 파블로 페냐는 “쿠바 국립발레단의 간판 무용수이자 예술감독으로서 알리시아 알론소는 발레단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쿠바 국립발레단에 대한 그녀의 기여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발레 이외에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없었고, 그녀의 에고가 그녀를 독재자로 만들었다”고 비판한 바 있다.




  

ⓒBallet Nacional de Cuba-BNC official




 1975년 페르난도가 알리시아와 이혼하면서 쿠바 국립 발레단의 세 창립자 가운데 가장 먼저 발레단을 떠났다. 쿠바 발레리나 아이다 빌록과 재혼한 그는 쿠바 중부의 카마구에이에서 카마구에이 발레단 및 발레학교를 1992년까지 이끌었다. 그는 2000년 쿠바 정부가 수여하는 예술 부문 평생공로상을 받았으며, 2008년엔 ‘무용계의 아카데미’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당스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다. 쿠바에 남은 페르난도와 달리 알베르토는 결국 쿠바를 떴다. 발레리나 출신인 소니아 칼레로와 재혼한 그는 1993년 아들 알베르토 주니어 등 가족과 함께 미국 망명을 택했다. 그는 미국의 여러 발레단과 대학에서 발레 마스터로 활동했다.
 그런데, 쿠바 무용수들 가운데 예외적으로 해외 활동을 허가받은 경우가 있다. 무용수들의 해외 활동을 강하게 막기보다는 다소 숨통을 터주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영국 로열발레단에서 오랫동안 수석무용수로 활동했던 카를로스 아코스타와 ABT 수석무용수였던 호세 마뉴엘 카레뇨와 시오마라 레이즈가 대표적이다. 해외, 주로 유럽 발레단의 초청을 받아 쿠바를 떠난 이들 무용수들은 대부분 돌아가지 않았다. 일부는 유럽에서 활동하다 명성을 얻으면 쿠바와 적대적인 미국으로 진출하기도 했다.
 이들이 쿠바를 떠난 뒤 돌아가지 않은 것은 귀국했다가 서구 세계로 다시 돌아올 수 없을까봐서다. 쿠바 무용수들이 망명하거나 해외로 나간 뒤 돌아오지 않는 일이 늘자 쿠바 당국은 2010년대 중반부터 “아티스트가 해외에 진출할 경우 일정 금액을 국가에 귀속한다”는 전제를 달고 해외 진출에 따른 금지 조치를 차례차례 변경하고 있다.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위험한 망명 과정을 겪지 않아도 되는데다 가족과 생이별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환영받고 있지만 아직은 활발하게 운영되는 것 같지는 않다.
 쿠바 당국은 지난해부터 해외로 망명했던 무용수들을 쿠바 발레 페스티벌에 대거 초청하는 등 유화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카스트로 사후 개방정책을 펴고 있는데다 올초 신임 예술감독으로 임명된 발세스가 알리시아 사후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가능성도 있다. 다만 테크닉 좋기로 소문난 쿠바 무용수들이 단번에 해외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을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장지영
국민일보 기자, 공연 칼럼니스트 

2019. 11.
사진제공_Ballet Nacional de Cuba-BNC official *춤웹진